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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2) 김대중(1924~2009)

앤 셜 리 2017. 12. 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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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을 아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안다고 대답할 것이지만 잘 아느냐고 캐서 물으면 잘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사람이 김대중을 알기는 하지만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을 두고 "그는 입에 지퍼를 단 사람이었다"고 말한 평론가가 있었다. 김대중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도 지퍼가 달려 있었고 그 지퍼를 전혀 열지 않았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세월에도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김대중에 대해 불만이 많은 줄로 잘못 알고 있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품고 있지 않다. 조국의 근대사에 그가 아니면 안 됐을 일이 여러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 가지 불만으로 여기는 일이 있다면, 왜 그가 생전에 후계자를 한 사람도 키우지 않고 떠났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주변에서 한평생 받들던 사람들―예컨대 한화갑, 한광옥 같은 준비된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는 어느 한 사람을 택하여 후계자로 삼고 키우지 않았고 그것이 잘못된 처신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서 후계자를 키우고 힘이 있을 때 밀어주어 훗날 청와대 주인이 되게 한 대통령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박정희가 재임 중에 김종필을 후계자로 삼았다면 10·26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삼이 대통령일 때 감사원장으로 발탁했던 이회창을 정치인으로 키우고 끝까지 밀어주었다면 김영삼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었을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대중과 나의 인연은 특별하다.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각 대학 문제 학생 명단을 만들어 문교부를 통해 대학 총장들에게 보내면서 학생들을 제적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연세대 박대선 총장을 찾아가 사표를 내면서 "그 학생들을 제적하면 나도 이 학교를 떠나겠습니다" 하고 한마디 던졌다. 집에 돌아왔더니 그 사실이 석간신문에 보도됐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은 그런 나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을 같이하자고 제의했다. 그다음 날 점심시간 서울시청 앞 어떤 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그때 김대중은 빠릿빠릿하고 잘생긴 사십 대 후반의 멋있는 사나이였다.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돼 생사가 불투명할 때 나의 동지들은 조마조마했다.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동교동 자택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먼저 달려가 그 문전에 진 치고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안에 들어가 면회한 사람 중에 나도 있었다. 박정희가 가고 전두환이 등장해 김대중이 국가 반란죄로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은 전두환이었다.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그는 특별사면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나는 그가 워싱턴DC에서 우거(寓居)하고 있던 때 강연 때문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워싱턴까지 갔다. 문동환(문익환 목사 동생) 박사가 거기서 나에게 "김대중 선생을 한번 만나보고 가시겠습니까?"라고 물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문 박사가 주선하여 김대중이 부인과 함께 머물던 교외의 한 아파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만일 그 사실을 전두환의 심복들이 알았다면 나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벤츠를 갖고 있던 교포 한 사람에게 부탁해 김대중이 칩거하던 아파트 주소만 일러주고 데려다 달라고 했다. 누구를 찾아가는지 말하지도 않고 그렇게 은밀하게 만남을 강행했다. 두 분은 기쁜 낯으로 나를 맞아주었고 이희호 여사는 우리가 밀담을 나누는 그 자리에 앉아서 성서를 펴놓고 읽었다. 김대중은 정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종교적 체험만을 늘어놓기에 "앞으로 정치는 안 하실 건가요"라고 한마디 하고 그 자리를 떴다.

세월이 가고 세상도 바뀌어 묶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정치를 재개할 수 있게 됐다. 그때 김대중은 나와 정치판에서 함께 일하기를 원했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정치와 인연이 멀었기에 거절했다. 내가 칼럼을 연재하던 한국일보에 '3김 낚시론'을 기고함으로써 김대중과 거리가 멀어졌을 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과 원수가 된 것도 사실이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에 여러 번 출마했지만 자신이 당선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믿었다. 다만 노벨 평화상을 받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랬던 그가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00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누릴 수 있는 최고 영예를 다 누렸다. 대통령이 된 그가 나를 보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어디서 나를 만나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보기에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들고나온 햇볕 정책을 내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나를 좋게 생각할 까닭이 전혀 없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오해를 풀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석양에 홀로 서서' 조용히 나의 노년을 보내고 있다. 요다음 세상에서 그를 만나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