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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서 최초 노벨상 나와야…" 평생 모은 676억원 기부 (유지한기자)

앤 셜 리 2020. 8. 1. 08:16

이수영회장과 남편

81세에 서울법대 동문과 결혼**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과 함께

 
카이스트에서 우리나라 최초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반드시 나와야 합니다."

23일 오후 2시 카이스트 학술문화관에서 이수영(83) 광원산업 회장이 평생 홀로 일궈온 676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하는 행사가 열렸다. 신성철 총장과 교수·학생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 회장은 6·25전쟁 직후 등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울컥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이 과학 기술로 패권 국가가 됐는데 우리라고 못 하라는 법이 없지 않으냐"라고 했다.

이 회장의 카이스트 기부는 2012년(80억원)과 2016년(10억원)에 이어 세 번째다. 지금까지 카이스트에 기부한 돈은 766억원이다. 이 학교 개교 이래 가장 많은 금액이다. 이전까지는 2008년 고(故) 류근철 박사가 기부한 578억원이 가장 많았다. 카이스트는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해 새로운 학문 분야나 인류 난제에 도전할 교수를 뽑아 지원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기자 출신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63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했고, 한국경제·서울경제신문사에서 일했다. 1971년 경기도 안양에 당시 10원 정도 하는 땅 5000평을 사 광원목장을 세웠다. 평일엔 기사를 쓰고 주말엔 농장을 가꿨다. 경제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1980년 노조를 설립했다는 오해를 받고 신문사에서 해직됐다.

17년 기자 생활을 마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돼지 두 마리와 소 세 마리로 시작한 목장은 10년 새 돼지 1000마리와 젖소 10마리로 늘어났다. 1992년 건설 붐이 일자 목장 대신 모래 채취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자서전에서 "그 일(모래 채취)로 짧은 기간 꽤 많은 돈을 모았다"고 회상했다. 1988년에는 여의도백화점이 입점한 빌딩 한 층을 인수하며 부동산 사업도 했다. 미국으로 부동산 사업을 확장하면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기부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1971년부터 서울대 법대 동창회가 설립한 장학재단 업무를 맡아, 발로 뛰며 장학금을 모았다. '재산을 기부하자'는 생각이 구체화된 건 2000년대 초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을 할 때라고 한다. 미국에선 재산에 관한 서류를 작성할 때 반드시 상속자를 적어야 한다. 당시 미혼이었던 이 회장은 "내가 죽으면 재산을 물려줄 곳을 서둘러 결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2018년 법대 동기인 김창홍 변호사와 결혼했다. 김 변호사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이 회장은 모교인 서울대가 아닌 카이스트를 선택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왜 하필 카이스트냐'는 질문을 받고 "언젠가 TV를 켰는데 서남표 당시 총장이 나오는 짧은 인터뷰를 보고 진심이 느껴져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고 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은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선 과학 기술이 중요하고, 카이스트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카이스트에 연락해 2012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90억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기부했다. 2013년부터 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사장으로도 재임 중이다.

이 회장은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를 겪어왔다. 우리나라가 잘살려면 과학 기술이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결과 카이스트는 우리나라 발전은 물론 인류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최고의 대학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기부금은 '이수영 과학교육재단' 설립에 사용된다. 재단 수익금으로 우수한 교수들을 선발·지원하고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것이 카이스트의 계획이다. 이 회장은 "어느 대학도 해내지 못한 탁월한 성취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드높이는 일에 이 기부가 뜻깊게 활용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카이스트에 더 기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