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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방역 성공은 단품 요리 아닌 코스 요리의 승리

앤 셜 리 2020. 5. 7. 08:25
코로나 바이러스19 방역 성공이라는 이야기가 잘 써지자 다시 '선진국'이라는 용어가 입에 오르내린다. 지금까지 '선진국'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 말의 심장에 선진국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이 담겼었다. 지금은 이미 선진국에 도달했다는 자기 확신과 대외적 자신감이 묻어난다. 이런 경우는 유사 이래 처음이다.

선진국 도약 못 하면 급격히 하강한다

우선 선진국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나는 졸저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문제를 다뤘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건국(새 정부 수립)-산업화-민주화"의 직선적 상승 진보를 말한다.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민주화'를 넘어선 다음 단계를 도모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민주화 다음을 도모해야 한다. 거기가 선진국이다.

우리는 '선진'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안다. 선진이니 후진이니 하는 일을 경쟁을 통해 줄 세우기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매우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는 심리와 연관된다. 경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품기보다 경쟁을 부정하며 일반성의 단계에서 평범해지고 싶어 하는 것은 지적으로 강인하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유약하기 때문이다.

경쟁 자체가 아니라 경쟁의 공정성이 문제다. 이전의 몇 정권에서 선진이라는 말을 먼저 사용한 사실도 그것에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한 요인일 것이다. 졸저를 출간한 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비판적인 말이 왜 꼭 선진국이 되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후진국의 삶보다 선진국의 삶이 더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풍요롭기 때문이다. 더 나은 자유와 독립과 풍요를 원하지 않으면 굳이 선진국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중진국까지의 삶으로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 지식 수입국의 삶으로는 지식 생산국의 삶을 만끽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중진국의 상위 단계에 도달하고 나서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않으면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하강한다.

물질문명 있는 곳에 정신문명 있다

선진국이 되려고 도전하기보다는 선진국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서구 선진국은 물질문명만 앞섰는데, 그것을 따르려고 하는 것은 매우 비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를 소홀히 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서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근대 제국주의 시절 이미 동양의 많은 지식인이 서양은 물질문명만 앞섰을 뿐 정신문명은 동양이 더 앞섰다는 식으로 자위적 해석을 한 적이 있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은 하나다. 안에 있어 보이면 정신문명, 밖으로 표현되면 물질문명이다. 과학 이해 능력, 지식의 양, 윤리적 태도, 도덕적 민감성, 청렴도, 시민의식, 공감 능력, 예술적 감수 능력, 모험심, 추상적 사유 능력, 도전적인 은유 능력 등과 같은 정신적 태도들이 잘 발달한 나라가 높은 수준의 물질문명을 건설하는 법이다. 우수한 물질문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에 맞는 수준의 정신문명이 함께 있다.

선진국의 정의도 다 다르다. 선진국은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말이라고까지 한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다 다른 것과 같다. 행복도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대접받곤 한다. 행복은 행복할 수밖에 없게 하는 좋은 세계관과 습관이 제공하는 선한 부산물과도 같다. 선진도 선진할 수밖에 없게 하는 어떤 특별한 의지와 노력이 제공하는 앞선 위치이다. 선진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힘이 바로 선도력이다. 선도력이 있으면 선진국이고, 선도력이 없으면 후진국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선도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선진국이 되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의지가 없으면 어떤 일도 안 된다.

코로나 방역 성공은 제도가 일군 성공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의 성공은 특별하다. '드라이브 스루' 등과 같이 이전에는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 창의적인 활동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더 의미 있는 것은 성공이 관련되는 범위가 넓다는 점이다. 이 성공에는 과학, 의학, 문화, 행정, 경제, 산업, 안보, 시민의식, 헌신, 봉사, 공감, 절제 등 한 국가를 지탱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거의 모든 분야와 덕목이 관여되었다. 매우 종합적인 의미에서의 성공인 것이다. 이런 종합적인 선도력을 구성하고 경험하는 일은 의미가 작지 않다. 우리는 이제 이 경험을 '이야기(story)'로만 남기느냐 아니면 '역사(history)'로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경계에 섰다. 이 경험을 지속하고 확산해야 비로소 역사가 된다.

이번 방역의 성공은 분명히 제도가 일군 성공이다. 건강보험제도나 질병관리본부와 같은 제도가 없었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한 국가의 발전은 감성적인 운동이나 구호 제창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쓸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루기 어렵다. 국가의 역사는 정책으로만 가능하다. 정책은 제도로 구현된다. 제도는 대표적인 '축적의 힘'을 보여주는 한 형태다. 1959년 중앙보건원 설립부터 1981년 국립보건원을 거쳐 2004년 질병관리본부로 확대 개편되는 축적의 역사가 오늘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 건강보험 제도도 1963년 12월 의료보험법 제정부터 지금까지 제도적으로 축적한 힘이다. 이 힘으로 오늘의 방역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복잡하지 않다. 미래를 위해 또 더 단단한 축적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서산대사의 말씀을 다시 듣는다. "눈 쌓인 벌판을 걸어갈 때에는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되리니."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최진석 새말새몸짓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