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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문화一流] 나치를 피해 유럽서 브라질까지… 고향 잃은 지식인의 절망

앤 셜 리 2020. 12. 29. 07:56

당대 가장 각광받던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나치를 피해 해외로 떠나기전
15년간 살았던 찰즈부르크의 집(왼쪽).
지금은 그의 인류애와 미학적 유산을 기리는
"츠바이크" 센터가 됬다.
츠바이크 센터를 둘러보는 사람들과 생전
츠바이크의 모습 (오른쪽 위부터)

코로나 때문에 유럽에 가는 것이 힘들어졌지만, 유럽에서도 잘츠부르크는 오랫동안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손꼽히는 여행지의 하나였다. 그리고 100년을 이어온 세계적인 예술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다. 그렇지만 잘츠부르크에는 그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높은 탑들과 멋진 궁전이나 성당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으면, 이 도시에 살았던 가장 지적인 시민의 자취도 찾아볼 일이니 그가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1881 ~1942)다. 그는 오스트리아 세기말 문화의 중심이었던 빈에서 방직 공장을 하는 아버지와 은행을 소유한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그는 부유한 환경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면서 많은 독서를 하고 여러 인문 분야에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결국 20세에 첫 시집을 출간하고 23세에는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떤 인물에 대한 평전(評傳)을 '전기문학'이라는 장르로 부르는데, 전기문학 사상 최대의 작가가 츠바이크였다. 그는 철저한 자료 수집과 유려한 글솜씨로 많은 평전을 써서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 〈에라스무스 평전〉, 〈메리 스튜어트〉,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등을 비롯하여 몽테뉴, 스탕달,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니체 등의 평전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발자크 평전〉은 명문으로 가득한 명저로, 위대한 작가 발자크의 인간성을 실감 나게 표현했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츠바이크의 사랑과 연민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다. 그는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소설도 많이 써서 1920~30년대에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집대성한 자서전 〈어제의 세계〉를 남겼다. 그는 글에서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종교의 편을 들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인류애적인 입장에서 세계의 통합과 평화를 소망하였다.

그런 츠바이크는 1919년부터 1934년까지 15년간을 잘츠부르크에서 살았다. 제1차 대전 이후 혼돈의 기간에 그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빈을 떠나서 조용한 잘츠부르크를 새로운 거처로 선택하고 저택을 구입하였다. 그는 〈어제의 세계〉에서 이 집을 묘사했다. "알프스는 산과 언덕이 있는 거리에서 완만하게 독일 평지로 옮겨가고, 내가 살던 작은 숲이 있는 언덕은 웅대한 산맥이 사라지는 마지막 물결이었다. 자동차로는 갈 수 없고, 계단 백 개가 있는 300년 이상 된 골고다의 언덕과 같은 산길을 올라가야만 했다. 이 난행의 대가로 테라스에서 탑이 많은 거리의 지붕과 박공을 굽어볼 수 있는 매력적인 전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알프스의 장엄한 산맥의 조망이 열려 있었다…." 그의 묘사처럼 이 집은 도심을 내려다보는 산 중턱의 저택으로, 대주교의 사냥용으로 지어졌던 집을 사들여 증축한 것이다. 그는 이 집에서 여러 책을 집필하였다.

그런데 누구보다 예견력이 뛰어났던 그는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말 없는 여자〉의 대본을 쓰면서 나치의 광기를 직접 체험한다. 오페라가 초연될 때 나치는 프로그램에 유대인인 그의 이름을 넣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츠바이크는 결국 다른 유대인보다 먼저 1934년에 이 집을 버리고 아내와 런던으로 피신한다. 그렇게 부유하던 그가 막대한 재산과 엄청난 장서(그는 손꼽히는 장서가(藏書家)였다)를 모두 남긴 채, 맨손으로 조국을 떠난 것이었다. 그러고는 런던에서 다시 뉴욕을 거쳐 브라질까지 간다.

결국 츠바이크는 지구의 끝 리우데자네이루 부근의 페트로폴리스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는 거기서 행복했을까? 침략과 살육으로 물드는 세상을 보면서 그의 절망은 커져갔다. 그리고 친지와 친구들이 차례로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는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만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결국 그는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고 판단하고 수면제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의 결정에 부인이 동참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남긴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생에 이별을 고하기 전에 나는 자유로운 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마지막 의무를 다해 두려고 합니다…. 60세가 지나서 다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 없이 떠돌아다닌 오랜 세월 동안 나의 힘은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제때에, 그리고 확고한 자세로, 이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친구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원컨대 여러분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마침내 아침노을이 떠오르는 것을 보시길 빕니다.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 (츠바이크 저 〈어제의 세계〉(곽복록 옮김, 지식공작소 발행))

'츠바이크 센터'는 츠바이크의 인류애 정신과 미학적 유산을 지키고 알리기 위해 그가 살던 집을 시에서 구입하여 2008년에 설립되었다. 현재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관리하며 그가 남긴 자료들을 보관하고 학술지를 발간하고 세미나를 연다. 이제는 엘리베이터까지 놓여서 글처럼 계단 백 개를 오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부러 골고다 같은 계단들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 암흑의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고뇌를 짐작해본다.

시대와 어울릴 수 없었던 그의 죽음은 허망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많은 책 속에서 그의 앞선 정신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다…. 여행이란 다만 즐거운 관광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고자 : 박종호 풍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