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책.

홍대용과 항주의 세선비

앤 셜 리 2023. 11. 22. 03:40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 조선의 뛰어난 선비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청나라에 파견되는 외교 사절단에 참여해 장장 6개월에 걸친 북경 여행을 다녀왔다.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국경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조선인들에게 세계 중심지로 알려진 청 제국의 수도 북경을 관광한다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홍대용은 남다른 기회를 얻어 북경을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진기한 견문록을 연기(燕記)와 간정필담(乾淨筆譚)그리고 (을행 연행록)이라는 3부작의 여행기에 담아 세상에 전했다.

영조시대, 홍대용의 부친 홍력은 사또, 고을의 군수였다.
홍대용은 성리학자 김원행의 애제자.

정사는 순위군 이훤 부사는 김선행 서장관은 홍억(숙부). 홍대용은 작은아버지의 사은행사에  참여했다.

을유년 (1765년영조41년, 건륭30년) 송도와 평양을 거쳐 의주에 도착한 동지 사행은 11월말 압록강을 건넜다 변경인 소읍인 책문(柵門)을 통과한뒤 심양과 산해관을 거쳐 그해 12월에 북경에 도착했다. 당시 서른다섯살의 장년이던 홍대용은 평생의 소원을 이룬 기쁨이 복받쳐 즉흥시를 지어 읇었다.
의장행렬을 뒤따라가는 일개 군관이 된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돌아보며 비분강개한 심정을 돌아본 것이다. 광할한 요동벌판을 지나면서 그는 "스스로 평생을 헤아리니 독속의 자라와 우물안의 개구리라. 어찌 하늘아래 이런 큰곳이 있는줄 뜻하였으리오" 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이와같은 광야를 건너보지 않으면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을 끝내 믿지 못할것이라고도 했다.
또한 수많은 재목들이 강변을 따라 몇리에 걸쳐 질서정연하게 쌓여있고, 거름으로 쓰는 하찮은 말똥조차도 단정하게 쌓여 있으며, 닦나무 뽕나무들이 드넓은 밭에 일사분란하게 심겨있는 광경을 보고 그는 크게 감동했다. 이처럼 규모가 거대하면서도 세심하게 마음을 쓴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이야말로 청나라 문물의 뛰어난 점이라고 보았다.
청나라 수도 북경 여행, 광대한 중국 산천과 청나라 발전상을 목도함에 따라
반평생을 우물안에 앉아서 날벌레처럼 꾸물거리다가 비로서 두눈을  부릎뜨고 의식의 변화를 감지했다.

북경 체류중에 홍대용은 중국 항주 출신의 선비 엄성ㆍ반정균ㆍ육비와 만나 막역한 교분을 맺었다 회시에 응시하고자 상경한 이 세사람은 1만명이 응시하여 합격률이 1%도 되지 안는 힘든 관문인 절강성의 향시에 급제한 우수한 인재였다.

천지를 부모로 한   동포이므로 화이 사이에도 진정한 우정이 가능하다고 역설 하며
건륭시대 청나라의 눈부신 발전상을 다방면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10대 시절부터 이미 과거 공부나 성리학에 골몰하지 않고 고학(古學)에 뜻을 두었다는 점이다.고학은 고대 중국의육예를 이상으로 삼아, 경전의 해석에 그치지 않고 경세제민에 기여하는 수학ㆍ박물학ㆍ음악학ㆍ 천문학ㆍ군사학ㆍ등을 포괄하는 실용적인 학문을 말한다.
그후 북경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중국의 쟁쟁한 선비들을 상대할 때에 대비하여 충분한 학문적인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이제부터는 하루 아침에 죽는다해도 인생을 헛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만나고 싶어 찾아 헤매던 바로 그런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맺게 된 감격을 토로했다.

엄성과 반정균은 사행 6개월만에 청나라를 떠나는 홍대용을 배웅하며 펑펑 울었다.
이미 노형의 마음을 얻었으니 간정동 천승점으로 찾아오지말고 단호하게 작별하자고 제안했다.


최후 작별 편지에서 육비는 종래 권세를 좆아 교제하고 이익을 좆아결합하는 자들은 대다수가 남들의 비웃음도 능히 돌아보지 않고 한때 찰싹 달라붙는 사이가 되며, 명성을 뒤쫒느라 왕왕 천리나 먼곳에서 선물을 보내오고 서로 결탁하여, 권세와 이익과 명성을 좆는 당시 중국 사대부의 위선적인 우정을 질타했다.
지금 우리는 권세나 이익이나 명성도 상관없는 사이인데도 잠간동안 맛본 기쁨과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날인 2월 28일, 육비는 작별 편지와 함께 손수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 부채들을 선물로 보내 왔었다. "이별의 슬픔이 일천곡(열말)이라 말(斗)로는 측량하기 어려우니, 갈림길에 임해 술 한 잔 마시지 못했도다.
다만 술이 슬픔으로 인해 대부분 눈물로 변해, 해풍에 비몰아치듯 옷 적실까 두려워서네" 라고 육비는 석별의 정을 간절히 노래했다

명나라 망한지 120년이 지나는 동안 대다수의 사대부는 고국을 잊어버리고 청나라 과거에 급제해 출세만 할 생각을 하고 있는 실정인데 해외의 이방인인 홍대용이 도리어 이런 중국의 세태를 비판하면서 명나라를 흠모하는 자기들을 알아줬기 때문이다.

이후,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 제작에 심혈을 기우려 화순의 노학자, 나경적과 협동하고 부친의 자금 지원을 받아 1차로 혼천의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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