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책.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앤 셜 리 2023. 9. 9. 08:28

책에도 명품이 있구나~ 제목부터 앤티크한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묘한 향수에 젖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작가 민병일씨는 늦깎이
39세 때 독일유학.  
2004년까지 8년 동안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시각예술 공부에 몰두. 이 대학 설립 250여 년 이래 가장 빨리 석사까지 마친 두 번째 유학생이었을 만큼 공부에도 뛰어났다.

독일 사람들은 1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물건들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주말이 되면 독일 전역에서 삶과 문화가 순환되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작가는 주말마다 수집한 램프,  몽당연필, 사발시계, 액자, 바이올린, 만년필, 진공관 라디오,
고서, 무쇠촛대, 찻잔 맥주잔, 연필 외, 등등
사진들과 더불어 각 사물에 얽힌 역사와 시대,  쓰임, 스쳐간 사람들의 정까지 듬뿍 담아낸 예술 에세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서
최순우 씨(국립박물관 관장)가 설명하면 깨진 기왓장도 문화재급이 되듯, 작가들은 말솜씨 글솜씨가 하늘이 낸 분들이구나.

유년(6섯살)에 떠나버린,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머니에게 다하지 못한 말 그리움의 정서가 그때, 세월의 흔적위에 글과 사진으로 어머니에게 속삭인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봤다.
나는 잃어비린줄도 모르고 살다가 아름다운 문장과 함께다시 찾아온 추억의 물건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사물뿐 아니라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첼리스트 이야기도 있고, 로텐부르크 같은 도시 이야기도 있고 1897년 안중근 의사 집 가족사진도 있다. 그리고  종일 브람스 음악만 틀어놓는다는 브람스카페도 소개했다. 별도의 얘기, 브람스는 평생 독신으로 클라라(슈만의 아내)를  흠모하며 살다 1896년 3월 클라라가 <77세세> 뇌출혈로 사망하자 무기력 해진 브람스는
클라라가 떠난 지 채 일 년도 안된 1897년 5월에 마침내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았다
나는 왜 이 대목에서 브람스의 수많은 작곡이 안들리고 클라라와 이루지 못한 사랑일까.
그 예민한 감성으로 어찌 견뎌 냈을까
하는 안쓰러움이 더 앞선거 같다.


박완서 작가님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첫 산문집이 나오면 책을 들고 달려가 어린애처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나처럼 박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비탄의 말에 가슴 싸해지기도 했다.

작가의 고향은
서울 경복궁 옆 효자동
1959년생.

전방위적 민병일 작가 언어유희를 쬐끔 엿보시길..

블랑케네제 마을 골목 길
또 보고 싶은, 다시 그리워질 책. 생이 저물지만 않았다면 내 서재에 꼭 소장하고 싶은 책. 있는책도 어찌버려야 할지 고민하는 요즘에랴.
시간이 멈춘 동화속의 중세, 로덴부르크 독일 유학길에 올라 첫 인연을 맺은 오래된 도시

첫날밤에 나는 낯선 별에 불시착한 사람처럼 외로움에 싸여 몸을 뒤척였다.
성문에 기대어 바라보는 들녘엔 양들과 목동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독일 도시중 가장 고대적인 도시이고, 가장 순수하게 중세적인 도시 극도로 정지된 도시 전체가 무대이자 예술 작품이었다.

(깊은 눈)추운겨울, 산중에 내린 폭설 어머니가 덮어주던 솜이불이 생각났다.겹겹이 쌓인 눈을 들춰내면 언 땅 어딘가에서 여린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 작은 씨앗을 만날 것 같았다.
벼룩시장의 잡동사니 틈에 있던 옛날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느 독일사람의 사유 도구가 되어 사람과사람사이에 사랑과 우정의 가교가 되었을 것이다. 나역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말을 이 고릿적 만년필로 쓸 것이다.
찌그러진 양재기 그릇들은 삶의 애환이 깃들어서인지 뜯어보면 볼 수록 곰보딱지처럼 정겹고 애잔했다 오랜세월 할아버지의 노동을 든든히 받혀준 도시락통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일찍 세상을 뜬 할머니가 새벽같이 준비한 빵을 이도시락 통안에 넣어 주었다며 쓸쓸히 웃었다. 양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지만 황금 그릇에 먹은 로마황제보다 더 행복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 얼굴에는 슬픔이 소진된 앙금이 검버섯 자국마다 엷게 끼여 있었다

1713년 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설마 벼룩시장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하면서도 금세 "맞을지도 몰라"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안경을 쓴 이십 대의 여자가 이리저리 보더니 사도 좋을 거 같다고 하며 음을 능숙하게 조율하여 연주를 해 보였다 바이올린 소리가 금빛으로 빛났다. 다행히 벼룩시장 수준으로 흥정이 이루어졌다. 독일 여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바이올린을 꼭 껴안고 집으로 향했다. 내속에 허영이고 사치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을 즐겁게 한다면 아름다운 일이지 않겠는가

백 년 전 상류층에서 쓰던 차 세트

사발시계를 보면 먼 곳에 두고 온 시간의 화첩이 보인다. 로텐부르크 한 성당 바자회에서 유명 시계회사 융한스의 사발시계를 샀다.

삶의 애환이 깃든 양은도시락과 주전자 뜯어보면 볼수록 정겹고 애잔했다.

찻잔과 찻주전자. 로덴부르크에서 독일어 공부할 때 요헨 힐트만 교수가 커피포트를 선물로 보내 주었다. 팔월중순부터 날씨가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독일에서 지내려면 차를 많이 마셔야 한다며 카밀레차 해당화차 페퍼민트차를 격려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다. 선물꾸러미 안에는 부부가 쓰던 전기밥솥과 밥공기 숟가락과 젓가락 외에도 약간의 쌀까지 있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남에게 베풀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이치를 은연중 알게 해 준 그분들은 독일에서 만난 나의 첫 번째 은인이다.

초로의 아주머니와 아저씨에게 산 연필깍기 한 쌍. 한쌍을 가지고 있어야 행운이 온다고. 두사람의 표정이 어찌나 밝고 따뜻한지 한쌍의 연필깍이가 아니더라도 이미 행운을 받은거 같았다.

벼룩시장에서 연필 깎기 한쌍을 샀다. 유년과 함께 사라졌던 연필과 연필 깎기. 데생이 뛰어났던 햇세와 괴테, 그들이 글도 쓰고 연필소묘등 늘 애용했음 직한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작품이란다.
p169

육백 원짜리 등하나가 아름다운 상상을 하게 되고, 고흐의 그림 속 별에게 가는 꿈도 꾸게 한다. 등은 에고를 해방시켜 주는 사물이다. 현실에 결박당한 꿈을 풀어헤친다. 1마르크에 샀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유학 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일 중의 하나다. 함부르크 앤티크시장에서 만난 100여 년 전 책. 독일인 신부가 조선을 돌아본 뒤 출간. 서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를 품은 이 책은 인간에게 외경심을 갖게 하는 성물(聖物)이며 영혼의 젖줄이다. 설령 전자책이 호황을 누린다 할지라도 나는 종이책 앞에서 코를 킁킁 거리며 종이 냄새를 맡고, 활자 박힌 자리를 어루만지며 독서하고 싶다. 이 책은 간수만 잘하면 앞으로도 이삼백 년은 족히 갈 것 같다. 누군가의 손에 건너가 역사와 인간의 따뜻한 풍경을 보여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내면과 외면이 적어도 백 년은 갈 수 있는 책을 펴내고 싶다.

독일, 금발의 노부부에게 산 진공관 라디오. "오래 머무르는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란다" 며 행운을 빌어 주었다. 독일의 시장바닥에서 만나 이야기하던 순수한 눈망울이 좋았다. 그네들은 소박하게 인생을 즐기는 법을 아는 듯했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파수를 맞추던 할아버지 할머니 손길이 느껴지는 라디오.

독일신부 노르베르트 베버가 찍은 (안중근 의사의 방)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

전혜린이 살아생전 자주 들렸다는 카페 슈바빙. 전혜린은 슈바빙을 뮌헨의 몽마르트라고 부르며 가장 정신이 자유로운 곳이라 했다.

백 포도주 (리슬링 포도로 빚은 프랑켄바인) 생의 시름을 풀어주는 짜릿한 소주와 인정이 넘치는 탁한 막걸리도 좋고 거품 수북한 맥주도 좋지만 포도주는 인생을 코페르니쿠스적
<어떤 패러다임을 완전히 깨버리는 새로운 발상>
전환으로 이끄는 신묘함이 있다. 생을 잠시 마취시키는 술.

독일 사람에게는 촛불 켜기는 일상이다 이 촛대의 묘미는 초 받침대의 꽃봉오리 모양에 있다. 촛대의 불빛은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잔차키스가 눈을 감은 곳 뮌헨 뒷골목에서 이 촛대를 샀다

민병일 작가 홍대앞 작업실은 그동안 모아온 잡동사니와 오래된 물건들이 채워진 곳. 퍼옴

짝이 다 맞지 않아 헐값에 판다고 했다.

아득한 형이상학적 심연으로 초대하는 소리, 첼로의 몸에서는 그런 소리가 난다. 활의 깊은 보우잉은 낭만의 질풍노도의 소리의 향을 피워 올린다. 로스트로포비치, 거장의 넉넉한 음악은 잘 익은 만추의 햇살과도 같았다.

함부르크 연주회가 끝난 후. 2007년 4월 말 라디오에서 그의 부음을 들었을 때 심장이 미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을 독주하던 로스토로포비치의 옛 모습과 노 거장의 따뜻한 눈망울과 목소리, 볼펜을 꾹꾹 눌러 집주소를 적어주던 인정 어린 모습이 기억에서 떠나질 않았다.

밤의 카페테라스.. 인간적인 고독과 예술가적인 고독 사이에서 붓질을 했던 한 그림쟁이를 떠올리게 한다. 지워지지 않을 고통을 그림에 새기고 지상을 다녀간 빈센트 반 고흐!

맥주마다의 개성적인 로고가 새겨진 맥주잔 받침대
오래된 펜촉과 잉크병
뚜껑달린 맥주잔
교수님의 연장 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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