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南漢山城)은 지척이었습니다. 새벽길을 한달음에 내달리니, 산성의 남문인 지화문(至和門)에 닿았습니다. 거기서 수어장대(守禦將臺)까지는 잰걸음으로 30분입니다. 수어장대는 청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지어놓은 지휘용 누각입니다. 잠실 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봄이 코앞이라지만, 새벽바람은 차고 드셌습니다. 370년 전 남한산성의 그 겨울을 떠올리기에는 더없는 날씨였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왕 인조(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百官) 등 500여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청(淸) 태종 홍타이치의 20만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 만이었습니다. 삼전도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受降壇)을 높이 쌓아 놓았습니다. 거기서 인조는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禮)를 올렸습니다. 조선 왕조가 창업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패(敗)하면 치욕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60여만명의 남녀가 만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7년 전쟁’이라는 임진왜란 때 왜(倭)에 납치돼 간 숫자를 3만명에서 10만명 정도로 어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50일 전쟁’으로 백성이 견뎌야 했던 지옥의 모습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삼전도의 비극을 놓고 훗날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습니다만, 항복밖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20만 대군에 둘러쌓인 성 안에는 1만 3000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밖에 없었습니다. 그 병사들마저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며 몸으로 새벽 서리를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성밖에선 청병(淸兵)들이 어미는 진중(陣中)에 붙잡아 두고, 그 어미 앞에서 갓난아이를 언 땅에 굴려 죽이는 짐승 같은 짓을 심심풀이로 해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항복이 아니라,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했던 정부의 대응입니다.
정부의 외교적 무지(無知) 무능(無能) 무책(無策) 무모(無謀)가 백성의 지옥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우선 당시 정부의 대응은 전(前) 정권인 광해군(光海君) 시절과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광해군은 청 태조 누르하치 진영에 여진어(女眞語)에 능통한 역관(譯官)을 끊임없이 들여보내 정세를 살폈습니다. “전쟁을 벌이고 있더라도 사자(使者)를 왕래시켜 그곳 사정은 알아야 한다”는 게 광해군의 지론이었습니다. 외교적 발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외교 기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데도 각별히 신경을 쏟았습니다. 조정의 중요 외교 정책 결정 사항을 그때의 관보(官報)인 조보(朝報)에 싣지 못하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행동으로 자주국방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무재(觀武才)라는 병사들의 무예 시범을 친히 참관하고 격려한 것입니다. 청의 기병(騎兵)을 저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어 부대인 5000명의 조총수(鳥銃手)를 힘들여 길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깥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책상물림들의 강경론을 특히 경계했습니다. “열 사람이 멀리서 본 것은 한 사람이 몸으로 겪은 것만 못한 법이오” 하던 부왕(父王)에게서 전해들은 지혜 덕분이었습니다. “우리 병력으론 저들을 막기 힘드니 겉으론 어루만져주면서 안으로 힘을 기르는 계책(計策)뿐”이라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이런 과정을 거쳐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아내고 들어섰던 인조(仁祖) 정권은 이 모든 것을 뒤집고 결국 나라의 치욕이고 백성의 지옥이었던 병자호란을 불러왔습니다.
이런 생각에 어지러운 머리로 항복터인 옛 삼전도를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송파구청에 전화를 넣고 물어 물어 찾아간 주택가 한복판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흔히 삼전도비, 비석에 새겨진 명칭대로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는 비석입니다. 비석의 부끄러운 옛 글귀는 세월에 씻겨갔지만, 역사의 치욕, 백성의 지옥은 거기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치욕은 파묻을 게 아니라 꺼내 씹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깥 세계를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던’ 그때 그 위정자(爲政者)의 거울로 오늘의 위정자를 비춰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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