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08.08.1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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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은 문단 연령으로는 선배이지만 살아낸 햇수로 치면 한참 후배이고, 마음으로는 스승이다. 그가 나에게 스승인 까닭은 한 권의 책 《별을 보여드립니다》때문이다. 이 책은 1971년에 나온 이청준의 첫 번째 창작집이다. 마침 내가 장편 《나목》으로 등단한 직후였다. 나에 대한 심사평은 호평도 있었지만 이 작가는 등단작이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우려도 있었다. 습작기를 거치지 않은 나에게 그 소리는 뼈아팠다. '여성지를 통해 나온 나에게 과연 문예지에서도 원고 청탁을 해줄까', '청탁이 들어온다고 해도 거기 응할 만한가' 하는 불안과, 이왕 등단이라는 걸 했으니 1년에 한두 편 정도는 문예지에 단편을 발표할 수 있는 작가가 됐으면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때였다.
그때 내 손에 들어온 것이 그의 빼어난 단편이 무려 20 편이나 수록된 중후하고 품격 있는 책 《별을 보여 드립니다》였다. '훌륭한 단편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거로구나' 이렇게 스스로 깨쳐가며, 감동도 하고 감탄도 해가며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가 초대해 준 세계에 들어가서 배회하는 사이에 개인적인 욕망으로 인한 불안감은, 그 때까지 주부로서의 편안한 일상을 지켜준 담 밖의 세상에 대한 눈뜸과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별을 보여드립니다》와 거의 동시에 읽게 된 《소문의 벽》은 다 치유된 줄 안 나의 정신적인 상처까지 건드리면서 나를 소름돋게 했다.
나는 그때나 이때나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활자중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위에 읽을 책이 없으면 불안하고, 닥치는 대로 읽고 건지는 것도 있지만 잊어버리는 게 더 많다. 소설은 읽히기 위해 있는 것이지 꽂아놓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빌려주기도 잘하고 안 돌려줘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이청준의 처음 책을 아무도 안 빌려주고 여태까지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 초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등단 초기 내 마음 속엔 계속해서 글을 쓰기 위해 좋은 스승을 찾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 암중모색의 시기에 이청준 같은 스승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실물을 알고 지낸 건 근래의 일이고, 동인문학상 심사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그저 어렵기만 해서 함부로 대한 적이 없다. 스승이니까.
이렇듯 그의 소설을 전범 삼아 단편소설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냈다고는 하나 그에게는 내가 넘볼 수 없는 그만의 높은 경지가 있었다. 평론가 김현이 《별을 보여드립니다》에 붙인 해설에 의하면 '그의 문장은 그의 감정과 느낌을 될 수 있는 한 극단까지 절제하여 독자들에게 작가의 감정적 개입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치밀하게 쓰여져 있다. 그는 윤리적이고 고전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자신을 감출 수 있는 한도까지 감춘다.' 그에 비해 나는 작중인물에 감정적으로 개입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쓰는 작가이다. 그런 차이가 그와 나 사이의 문체의 차이가 되어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먼저 간 문단이 이렇게 크게 쓸쓸할 줄이야. 스승이 먼저 간 것은 순리일 수 있겠으나 나이로 치면 순서를 어겼으니 살아남은 늙은이를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소설가 박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