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집|현대문학|140쪽|9000원
"반짝이는 아이디어로만 썼으면 벌써 고갈됐겠지요. 그러나 제게 문학은 체험이고 삶의 축적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를 걸고 바로 지금 이 순간과 대화해서 나오는 것이 시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쓰겠습니다."
〈즐거운 편지〉로 등단한 지 올해로 51년. 생물학적 나이도 50을 넘기면 매너리즘의 유혹에 버티기 어렵다는데 시인 황동규(71)는 여전히 힘차고 참신하며 날카로운 시를 쏟아낸다. 《꽃의 고요》 이후 3년 만에 나온 그의 14번째 시집에는 시들지 않은 열정으로 빚은 시 63편이 담겨 있다. 죽음에 맞서 생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노래한 시편들이 독자의 마음을 탁 트인 무애(無碍)의 벌판으로 이끈다.
보름간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고 난 뒤 쓴 시 〈삶의 맛〉에서 그는 '오늘 아침 문득/ 허파꽈리 속으로 스며드는 환한 봄 기척'을 느낀다. 막혔던 코도 다시 뚫렸다. '좀 늦게 핀 매화 향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발을 헛디딘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있음!/(…)/ '광폭(廣幅)으로 걷는다.'
살아있음에 환희를 느낄 수 있다면, 살다가 겪는 쓰라림과 아픔쯤이야 축소할 것도 과장할 것도 없이 대범하게 받아넘기게 된다고 그의 시들은 노래한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일부)
'다 왔다./ 깨끗이 비질한 마당에 눈 더 내리지 않아/ 무언가 더 쓸거나 지울 것이 없다.'는 시 〈잘 쓸어논 마당〉과, '어차피 이 삶이라면 맨 머리 맨 시간이면 된다./ 아, 이 맨 가을!'이라고 한 시 〈맨 가을〉에서도 시인은 적극적인 긍정의 세계를 반복해 보여준다.
젊음을 앗아가는 시간의 폭력 앞에서 허무에 빠지지 않는 것도 이런 긍정의 힘 때문이다. 오히려 '그래, 젊음 뒤로 늙음이 오지 않고/ 밝은 낙엽들이 왔다.'(〈밝은 낙엽〉)는 재치로 노년을 수긍하고 받아넘긴다.
'환한 살아있음'은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 보여주는 실존의 새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 '환함'은 어둠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이제 막 신록으로 피어나는 푸른빛의 어설픈 느낌과는 질감이 다르다.
수록시 〈낯선 외로움〉에서 시인은 풀 한 포기에서도 그것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느낀다. '자기만의 길이와 폭과 분위기를 가지고 살면서 풀에겐들/ 왜 저만의 슬픔과 기쁨이 따로 없으랴./ 마주 앉아 찻잔 비울 때까지/ 속으로 삭이고 삭여야 할 생각 왜 없으랴./ 삭이고 일어설 때 사방에 썰물 빠지는 적막, 속의 황홀!'
"시인의 책무 중 하나는 말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며 시집마다 새로운 조어를 선보이는 것도 여전하다. 이번 시집에서는 '맨 가을' '초밤''무추억' 등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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