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08.12.12 13:09
- "아무것도 모르고 힘 없는 시골 노인"이었던 노건평씨가 구속됐을 때, 그 속에는 자연의 이치(理致)가 숨어 있었다.
그날 밤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에는 밤늦도록 불이 환하게 밝았다. 거의 뜬눈으로 날 샜던 취재기자들은 주점에 모였다. 흥분과 피로감에 젖어 누군가가 "오늘 한 매듭이 지어졌군요.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시작이 있겠지만" 하고 말했다.
지난 정권 '실세(實勢)'들이 줄줄이 검찰 수사를 받는 것이,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자연 이치와 어떤 상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정권이 바뀌면 으레 한바탕 치르는, 혹은 이를 겪어야 정권이 바뀐 것을 알리는 '의식(儀式)'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 초에도, 앞선 정권에서도 그랬다. 이번에는 약간 더디게 발동이 걸렸지만, 역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 정권마다 검찰의 '칼'이 사랑받는 것은 이런 연유다. 이처럼 '진부한' 순환반복이야말로, 돌고 도는 자연의 이치와 부합하는 것이다.
역대 정권에서 세상 모든 걸 마치 쥐락펴락 할 것 같았고, 자신의 몸에 꿀을 발라놓은 듯 사람들을 들끓게 한 '실세'들의 행로(行路)는 한결같이 비슷하다. 과장하면, 눈감고도 그 길의 종착점을 맞힐 수 있다. 이 땅에서는 힘이 셀수록, 그 힘을 과시할수록 '감옥행 1순위'다.
권력의 문고리를 잡은 이들은 한때는 하늘 한가운데 보름달로 둥실 떠 있었다. 그런데 보름달로 뜬 기간의 덧없는 짧음을 깨닫지 못한다. 달도 차면 기운다. 공중에 계속 떠 있겠다고 고집해도 허락될 리 없다. 보름달로 터질 듯이 꽉 찬 순간, 이미 그 속에는 그믐달의 쇠락이 들어 있는 것이다. 장담컨대 그 쇠락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정권 교체 주기(周期)마다 이런 '냉정한' 자연 이치를 목격하는 셈이다.
물론 어느 누군들 짧게 한 번 누리고, 남은 인생을 욕되게 사는 걸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도덕, 투명, 깨끗함"을 즐겨 말한다. 그런데 나중에 털고 보면 온갖 횡령, 청탁, 특혜 비리로 얼룩져 있다. 권세란 한 터럭만 움직여 봐도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저 하늘의 보름달 속에 숨어 있는 '그믐달'이 이들 눈에는 더 이상 안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대담해지고, 남의 이목도 안 가리고, 입을 쫙 벌려 꿀꺽꿀꺽 삼켜댄다. 심지어 "나 먹었소" 하며 배를 쑥 내밀고 다녀, 주위에서 소문이 나도 "감히 누가 나를 건드려" 하며 아랑곳없다. 실제 힘이 셀 때는 "동네 이장처럼 순박한 분" "옆집 아저씨 같은 분"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사람" 등 주위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잘도 막아준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뒤끝이 구질구질해진다. "내 이름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청탁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청탁은 아니고 '말 좀 들어보라'고만 했다"…. 한때의 기세는 어디 가고, 하루 사이에만 말이 이렇게 바뀌는 것이다. 증거를 눈앞에 들이대야 "일부만 맞다"고 억울해한다.
이런 행로는 한 개인 '봉하대군' 노건평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전에도 이만큼 쟁쟁한 실세들이 활개쳐 왔다. 등장인물은 달라도, 그 종말은 붕어빵 찍듯이 똑같다. 마치 '대통령 친인척 및 실세들을 위한 행동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정권 주기마다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현 정권에서도 이런 '예비 스타'들이 서서히 양성되고 있는지 모른다. 이들도 "도덕, 투명, 깨끗함"을 즐겨 말하다가, 4년 뒤쯤 사정(司正)의 칼날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다. 권력과 인간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흥미로운 점은 정권마다 그렇게 반복돼도, 그때만 지나면 금방 잊혀진다. 그래서 순환 반복되는 자연의 이치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최보식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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