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첫 창작집을 내고 나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책을 몇 쇄나 찍었는지, 돈은 얼마나 벌었는지부터 물어본다. 유명 인사가 된 기분은 어떠냐는 짓궂은 질문도 있다. 겨우 몇 쇄로 떼돈 벌 일도 없었고, 아직 알아보는 사람도 없으니 걱정 말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렇게 말해도 어떤 친구는 화끈하게 밝히라고 채근한다. "누구는 좋겠다. 평생 인세 한 번 받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둥 친구들이 하도 인세 타령을 하는 통에 거의 반은 강제로 점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모임이 있는 날, 한 친구가 뭔가를 따져 보려는 듯이 캐물었다.
"그런데 그 책 쓰는 데 얼마나 걸렸니?"
"글쎄, 한 10년쯤 걸렸나."
머릿속에서 굴린 시간은 빼고 실제로 쓰기 시작해서 걸린 세월이었다.
그는 갑자기 숟가락질을 멈추고 떠나갈 듯한 소리로 외쳐댔다.
"얘들아, 10년 걸려 고만큼 벌었단다. 장장 10년. 그 소리 듣고 니들 밥이 넘어가니."
나는 다들 자리에서 일어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밥 살 만큼은 벌었으니 안심하라"며 겨우 수습했다. 친구들에게 어떻게 다 설명하랴. 뒤늦게 등단했을 때 어떤 분이 불러준 '신춘문예 새내기'라는 애칭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이름을 얻었을 때가 남자에게 처음 사랑을 고백받았을 때보다 더 떨리고 희열에 찼었다는 것을. 평생이 걸리더라도 한 줄의 명문을 남기고 싶다는 나의 허영을.
인세 얘기가 가라앉자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 나이에 소설을 쓰다니 대단해." 나는 좋아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난감했다. 친구는 한 술 더 떠 불혹에 등단한 박완서 선생님의 연령을 20년이나 훌쩍 뛰어넘었다며 건배제의까지 하는 게 아닌가. 볼멘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자꾸 나이 얘기만 하면 다른 건 없는 것 같잖아'라고.
조촐한 삶이지만 여태껏 나이를 의식하고 살아온 적은 없었다. 오죽하면 신춘문예 당선 기사에서 내 나이를 확인하고 기겁을 했겠는가. 그런 마당에 막상 꿈의 첫발을 내디뎠는데 작품보다 나이로 들먹여질 때의 참담함이란.
나는 억한 마음에 술만 퍼마셨다. 얼마 뒤 독서 모임에 초대를 받는 일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독자들의 모임이었다. 독자와 직접 대면했을 때 나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 아직 불타고 있는 생에 대한 꿈과 열망이었다. 그들은 늦깎이의 작은 성취에서 삶의 진실 한 가지를 건져내 기꺼워하고 있었다. 그 진실이란 '무슨 일에서나 결코 때늦은 나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나이로 회자되는 것에 대해 샐쭉할 것까지는 없겠다 싶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몇 쇄라도 찍어 출판사에 면구스러움을 덜게 된 것은 늦깎이를 응원해 준 그분들 덕분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어쩌다 나는 '그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한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곧 내게 삶의 유한함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준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때 나는 평생의 꿈이었던 글쓰기를 이제는 정말 시작하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밥벌이와 병행하느라 등단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내리 다섯 번을 낙방했을 때는 송충이와 솔잎 타령도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등단과 관계없이 글쓰기를 내 평생의 업으로 삼으리라고.
어려서 겪었던 근대사의 폭풍과 가족의 시련은 내겐 큰 아픔이자 비밀스러운 자산으로 여겨졌다. 그 아픔 속에 깃든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나는 반드시 쓰고 가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이곳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만 되었다. 중국 동포와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민자가 밀려들어오고 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흐르고 흘러 어느 곳에 이르게 된 사람들. 그들의 서러움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 것 같았다. 내게는 어려서부터 전쟁에 쫓겨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던 피란민의 정서가 깊이 박혀 있었다. 평생 번역을 하며 가슴에 품어왔던 다(多)문화와 세계시민사회가 열리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따스하고 널찍한 우리의 온돌방에 문화와 이념,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품어 안는 그날을 나는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려 왔던가.
하지만 아직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해 겉도는 사람들. 그들이 간신히 둥지를 튼 누추한 가리봉동 쪽방촌, 그 꼬질꼬질한 삶의 솔기 솔기에서 나는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인간의 고귀한 꿈과 희망을 보았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의 영혼에 빠져들었을 때 등단은 기적처럼 왔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첫 소설집을 내게 되었다. 선배들의 명문(名文)을 대하다 보면 미흡한 글을 세상에 펴낸 것이 부끄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랴, 계속 쓰는 수밖에. 모자라는 공부도 하고 메말라가는 감성을 촉촉이 적셔가면서. 기왕에 얻은 애칭에 걸맞게 나는 풋풋한 새내기의 삶을 즐길 것이다.
박찬순 소설가·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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