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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의 YMCA 운동

앤 셜 리 2010. 9. 6. 20:10

1910년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근교 진관사에서 '제1회 기독교학생 하령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46명의 학생이 참석했고, 4개국 6개 교파에서 16명의 연사가 도착했다. 국망의 위기 속에서 기독교 청년 학생들이 교파를 초월한 국제적인 모임을 개최한 것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YMCA가 조직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있었다. 1903년 헐버트와 게일 질레트 등이 창설한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를 한국의 평화주의적 구국운동의 중심체로 발전시킨 인물이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좌측 사진〉이다.

충남 한산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목은 이색의 16대손으로 태어난 이상재가 기독교에 입교한 것은 1904년 54세 때였다. 이에 앞서 주미 공사관 서기관으로 미국에 갔을 때(1896년) '문명부강한 국가 건설에 기독교가 유용하다'는 생각은 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1902년 민영환과 박정양 등이 주도한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한성감옥에서 보낸 2년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게일 등 선교사들이 차입해 준 성경을 비롯한 각종 기독교 서적을 읽었으며, 이승만 등이 추진하던 '감옥학교'에도 참여했다.

모든 활동을 제약받는 감옥의 암울한 생활을 미래 구국을 위한 믿음과 희망으로 바꾼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한성감옥에서 기독교의 감화력을 체험한 이상재는 1904년 출옥 즉시 게일이 만든 연못골예배방(연동교회)으로 찾아가 옥중 동지인 김정식 등과 함께 집단 입교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교육부 위원장을 맡아 YMCA를 구국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육성했다〈우측 사진·YMCA 지도자들과 함께한 월남(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절친한 동지였던 민영환이 자결하고 스승과도 같았던 박정양 또한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자, 이상재도 자결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YMCA 질레트 총무와 김정식 간사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꿔 YMCA를 통한 기독교 구국운동에 여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그는 구국운동의 주체로 청년 학생을, 방법으로는 국제적인 종교 사회운동을, 사상적으로는 기독교적 보편주의와 평화주의를 선택했다. 순국을 결심했다가 YMCA운동에 투신한 이상재의 모습은 마치 '순교자'며 '예언자'와 같았다고 한다(전택부, '월남 이상재의 생애와 사상').

그가 개설한 성경반에는 수백명의 학생이 모였는데, 1911년 5월 한 달 동안 4200명이 모인 적도 있었다. 1911년 말까지 배재학당·상동청년학원·경신학교 등 6개 학교에 YMCA가 조직됐다. 일제의 폭압 통치 하에서 모든 정치적 결사가 금지되었지만, 종교성을 띤 YMCA는 오히려 발전하여 한국 청년들의 구심체가 되었다.

1914년 이상재는 전국의 기독교 청년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이 1919년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라는 거족적 민족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사 사장을 역임한 영원한 청년 이상재는 1927년 신간회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병사하고 말았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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