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좋아하는 "시"

’까치 설’ 등의 전문. 박경리.

앤 셜 리 2009. 3. 16. 12:39

 


                           

 


’까치 설’ 등의 전문.

◇’까치 설’

“섣달 그믐날, 어제도 그러했지만/ 오늘 정월 초하루 아침에도/ 회촌 골짜기는 너무 조용하다/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푸짐한 설음식 냄새 따라/ 아랫마을로 출타 중인가 // 차례를 지내거나 고사를 하고 나면/ 터주대감인지/ 거릿귀신인지/ 여하튼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채탄에 담아서/ 마당이나 담장 위에 내놓던/ 풍습을 보며 나는 자랐다 // 까치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음식 내놓을 마당도 없는 아파트 천지/ 문이란 문은 굳게 닫아놨고/ 어디서 뭘 얻어먹겠다고/ 까치설이 아직 있기나 한가 // 산야와 논두렁 밭두렁 거리마다/ 빈병 쇠붙이 하나 종이 한조각/ 찾아볼 수 없었고/ 어쩌다가 곡식 한알갱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새들의 차지/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목이 매이게 척박했던 시절/ 그래도 나누워 먹고 살았는데 // 음식이 썩어나고/ 음식 쓰레기가 연간 수천억이라지만/ 비닐에 꽁꽁 싸이고 또 땅에 묻히고/ 배고픈 새들 짐승들/ 그림의 떡. 그림의 떡이라/ 아아 풍요로움의 비정함이여/ 정월 초하루/ 회촌 골짜기는 너무 조용하다”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 했다 //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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