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나의 이야기

허세가 떨어진 오래된것이 좋다

앤 셜 리 2020. 1. 9. 07:47

 

-- 32인치 테레비젼 --

 

우리 영영 못 만나겠지

이제사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본다

 

직사각형 까만 몸체에

은색 테두리

등허리엔 무거운

짐을 짊어진

네 모습을ᆢ

 

생산자도

유통기한 5년짜리를 만들진 않았을텐데

좋은 인연 만나 잘 살아야 한다 쓰다듬으며

보냈을텐데ᆢ

 

네 앞에서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함께 했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죽도록 배가아파 고통스러울

때도 묵언으로 안타깝게

바라봐 줬고

보름만에 퇴원한 나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밝고 환하게 위로 해줬지

감미로운 음악으론 미끄럼타듯 스르르 잠들게도 했잖아

창호지처럼 메마른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누워 있을 때도

너만은 나를 지켜줬고

 

모아온 팸플릿을 보라고보라고 해도 나는 시쿤둥했다

알아 듣지도 못하고 사용도 하지않을 신형이

못 마땅해서다

 

드디어 삼성 55인치 FULL HD TV가 

사양 한번 안하고 겸손하지도 않게 

당당히 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빵빠레라도 울려 달라는 기세다

 

기계치인 나는 낯설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생 이별을 해야 하는,

밖에 나 앉은 너만 아쉽다

난, 새것은 싫다

물건도 사람도 허세가 떨어져 나간 오래된 것이 좋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의 작별 선물인가  (0) 2020.02.18
골목길  (0) 2020.02.14
힘내세요!  (0) 2019.12.29
간절기  (0) 2019.11.30
와인이 문제  (0) 2019.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