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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간 최고 악단들 이끈 명지휘자 "세상 구원 못 해도, 예술은 소중한 일"

앤 셜 리 2021. 11. 9. 09:28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지난 10월 21일, 가장 넓고 깊은 경험을 쌓은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지휘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화려하지 않고, 가장 겸손하고, 가장 조용하게 살았지만, 최고의 실력을 지녔고 가장 많은 명반을 녹음했던 지휘자 중의 한 명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1929~2021)가 92년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이력을 나열하려면 어떤 지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유명 지휘자들은 외향적인 화려함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통솔력이나 세련된 제스처나 매력적인 외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다. 평범한 외모에, 독특할 것이 없는 동작에, 눈을 끌 사생활이나 기벽도 없다. 도리어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다. 말도 적고 느리다. 그는 청중의 환호나 매스컴의 주목에 당황하고 심지어 충격까지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에 걸쳐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들을 수없이 지휘하였다.

그런 그가 누군가와 함께해야만 하는 지휘라는 작업을 어떻게 해내었을까? "지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나도 모르겠다. 지휘란 신비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겸손한 지휘자를 보았는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한 사람의 확신을 통해서 연주라는 현상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지휘라고 정의한다. 지휘란 혼자 악보를 공부하고 상상하고 고민하는 것이며, 지휘대에 서서는 잘 듣는 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하나가 더 있다면 연주 내내 주도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젊어서는 그것을 알기 어렵고,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경험 많은 지휘자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

암스테르담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나치 점령 시절의 가난과 암울함 속에서 바이올린과 지휘를 공부하였다. 30세에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린 주자로 들어갔는데, 2년 만에 로열 콘서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기회를 갖는다. 이후로 이 악단의 상임지휘자로 28년을 봉직하면서, 지금까지도 이 악단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불리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또한 그는 60년 동안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오페라하우스, 글라인드번 페스티벌의 음악 감독으로도 각기 10년 이상씩이나 재직했다. 또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도 역임했다. 그는 이런 최고의 악단들과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 등의 교향곡 전곡과 많은 오페라 등 무려 450종의 음반을 남겼다. 그의 음악도 자신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평온하고 진실한 소리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항상 조용했던 그의 지도력이 발휘된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그의 놀라운 공적은 단원들의 해고에 용감하게 앞장서서 항거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네덜란드 정부가 지원을 축소하여 로열 콘서트허바우 단원 23명을 해고하려고 하자, 그는 사임하겠다는 발언으로 23명의 직장인을 구했다. 2010년대에도 정부의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지휘를 거부하였다. 영국에서는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단원을 줄이려 하자, 콘서트 도중에 지휘봉을 놓고 로열 앨버트홀을 메운 군중을 향해 정부에 항의하였다. 그 눌변으로 목소리를 떨면서 말이다. 그 후로 그에 대한 세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신망과 존경은 더욱 높아졌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개런티를 받는 자리다. 2006년에 시카고 심포니가 그에게 상임지휘자를 제의했을 때 그는 노령을 이유로 사양하였는데, 욕심쟁이들이 많은 지휘계에서는 신선한 결정이었다. 대신에 그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유럽연합 청소년 오케스트라(EUYO)의 지휘자는 작은 보수에도 선뜻 수락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많은 오케스트라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카라얀보다도 더 오랜 50년이나 베를린 필을 지휘했다. 그가 수석지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서 그는 단원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악단을 평가할 수 있었다.

2019년 6월에 90세가 되자 하이팅크는 은퇴를 밝혔다. 그해 여름에 암스테르담, 런던, 잘츠부르크 등에서 연이어 열린 은퇴 콘서트에서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지휘대에 올라 자신의 모든 것을 들려주었고, 청중은 그의 예술에 대한 평생에 걸친 헌신을 향해서 눈물을 흘렸다. 9월 6일 루체른에서 빈 필하모닉과의 콘서트를 끝으로 그는 만장의 기립 박수 속에 퇴장했다. 그 후 2년간의 코로나 시대를 거치고 이번에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그는 다른 여러 유명 지휘자들처럼 스포츠카도 요트도 전용 제트기도 없었다. 그는 속도와 소음을 싫어했다. 그는 긴 세월을 느리고 조용히 살았다. 그는 사치품도 없다. "사치품은 이미 많아요. 집이 있고 아파트가 있죠. 이것만 해도 저는 당혹스러워요." 그는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만, 우리에게는 물건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시간이 부족해요"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이팅크는 유럽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에게 파괴된 세상은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다. 건물이나 다리의 복구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정신은 여전히 부서진 상태다.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에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세상은 이 꼴이니까. 하지만 그는 말했다. "설혹 예술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기고자 : 박종호 풍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