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나의 이야기

잃어버린 낙원(예산)

앤 셜 리 2021. 11. 17. 02:21

눈을 감고 어제 다녀본 길을 되짚어가며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려보아도
내 기억 속 그 길은 없다.
우리 집 옆에 있던 큰 복숭아 과수원까지야
바라지 않지만
조가비 같은 작은집들 담 사이로
다음 집과 연결되고 아카시아
울타리 과수원을 지나 자박자박 얼마 걸어가면
신작로, 학교 가는 길이 나왔는데.

이정표가 된 오리동 성당,
뚝은 어디로 갔을까
분명 성당 올라가는 길은 뚝이었는데
저만치 성당은 제 자리에 있는데
뚝의 주인공이었던  양쪽 우람한
프라다 나스도 뚝따라 사라졌다.
내 눈은 멈출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선풍기도 없던 시절 더위를 피한
동네 사람들 부채 들고 나와
프라타나스 나무 그늘 밑에 쉬곤 했는데
저절로 바닥에 생겨난 고단한 삶들의
장사터가 되었던 곳. 사람들은 없어지고
옛 성당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아원 애들이 많이 다녔다는 신흥동에
장로교회도 제자리엔 있었지만
최신식 건물로 우뚝!. 온갖 치장 다 하고 성도들보다
더 먼저 하늘에 닿을 기세다.

고향 떠나온 지 50여 년,
어쩜 시간에 이토록 굴복할 수 있을까
풍상을 부대껴냈을 만한 건물도 도로도
사람도 옛것은 눈 씻고 찾아볼래도 없다
개울물 흐르던 곳은 복개가 되었고
막혔던 길은 확 뚫어 지름길이 되었고
흔하던
은행나무 미루나무 등은 흔적도 없고.
최신식 건물들만 울창하다.

그런데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 갔을까
길을 물어 볼래도 또랑또랑한 사람이 없다.
(한분은 모르겠다고 하고 또 한분은
이 동네 사람 아니라 모른다고)
가을바람에 낙엽 하나 뒹굴지 못하는 거리
인적 없는 고향은 황량하기만 하다
그 무엇 한 가지 옛사람을 알아
반기는 것은 없다.

자동차도 별로 못 본 거 같다.
자동차도 사람들도 넘쳐나는
복잡한 서울살이 부작용일까.
11월 15일, 마침 오일장 예산 장날
거기에서 사람을 보았다.
세월을 이겨낸 장터 같지만 가끔 꿈에서
봤던 들 벅거 리던 장날 모습은 아니다.
싸전, 포목전, 어물전,
개울물 흐르는 아래쪽, 위쪽 다리가
두 개나 있었는데
마술인지 요술인지 다 사라지고 펑퍼짐한 광장으로 변해 있었다.
옥황상제 만큼이나 아주 먼 고향이다.

내 고향 예산군 예산읍 신흥동
첫 숨을 쉬고 첫 하늘과 햇빛과 내 뼈가
자라고 내 육친들과 부벼대며 한글을
깨치고..
번뇌가 뭔지 삶이 뭔지 생로병사가 뭔지
모르던 유일하게 행복했던 호시절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거라는 걸
어찌 알았을까.

앞산에(관양산) 봄이면 진달래 피고 지고
오월이면 또래들과 산딸기. 찔레꽃 순
따고 바구니 들고 나물 캐러 산으로 들로
헤매던 곳
자고 일어나면 하얀 눈 뒤집어쓰고 바로 코앞에
마법처럼 나타난 겨울산
맑은 햇빛이 쏟아지던 동네
함께 놀던 친구들은 지금 나처럼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살아는 있는 걸까.
후순이 후희 귀남이 귀숙이 자매들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린 어릴 적 나의 우주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옛 고향
모든 게 희미해져 가는데 옛 생각만은 더욱
또렷해지는데
이젠 꿈속에서나 만나 향수를 달래야 되나.

집착하지 말자
대지와 하늘 그밖에 영원한 것은 없는걸
모르진 안잖아
우리는 먼지에 불과할 뿐인걸.
인간은 추억의 동물이니 의식이 있는 한
상념이야 떠오르겠지만 내려놓자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2021.11.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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