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책.

조선왕조 오백년 사도세자 편.20권

앤 셜 리 2009. 3. 13. 14:59

흔히들 "뒤주왕자"라고 부르는 사도세자,

그의 죽음을 어찌 해석해야 옳을까.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케 한 사실에 누구보다도

깊이 의아심을 품은 세자가, 영조를 임금으로 밀어올린

노론 세력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언동을 보였기 때문에

노론의 주축들이 훗날을 위해 미리 제거 했다는 설을 내세운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영조의 변덕과 세자의 질병이 큰 요인이었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한다.

또 일각에서는 노론 내부의 분열에 따른 정치적 희생물이라는

말도한다.

 

그러나 이 일은 부왕이 당시의 세자이던 아들을 뒤주속에 가두어

굶겨죽인 사건이다. 아무리 정쟁이 극렬한 시대이고 왕권이 당론에 위해 크게 위협받던 시대라 하지만 임금이 아들인 세자를 죽이자고 그처럼 가슴아픈 방법을 취했다는 사실은 일단 그 부왕의 심리적인 상태를 의심하게된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사이에서 난 왕자가 아니던가. 다른때 같았으면 보위는 커녕 왕자로서의 향유함도 유지하기 어려운 신분이었다.

 

무수리 몸에서 태어난 왕자라는 손가락질로 부터 보위라는 광영의 자리까지 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파란만장한 인간사 정치사 무시당하지 않기위해서 당당한 왕자로 행세 하기 위해서 임금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빼았아야 했는지.

 

옳바른 길을 걸어온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받아드리는 폭이 넓다.

반면 정도가 아닌 길을 걸어온 사람은 그런 지적을 역으로 맞서게된다 남달리 심지가 곧지않은 영조의 성품은 바로 부당하게 보위를 이은 임금이 지닐 수 있는 성품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어떠한 말한마디도 견뎌내지 못했다.

 

한데 사도세자는 영조의 부당한 행적에 의아심을 품고

무언의 항거를 했다.

 

思悼世子(선) : 28세때 뒤주에 들어간지 8일째되는 새벽에 절명

 

영조가 아들을 죽인것은이 그런 가정적 개인적 배경에서 비롯되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맹자는 아들을 잃었을때 " 네가 나를 위해 울어야 하거늘,

내가 너를 위해 울다니.....

장차 나를 위해 누가 울어 준단 말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