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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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피스랍니다”

앤 셜 리 2010. 6. 3. 17:00

“저는 원피스랍니다”

 

어떻게 태어나 살아가는지 말씀드리자면…

 저는 줄무늬 원피스입니다.

지금은 어둡고 침침한 경기도 광주의 창고에 누워있습니다.

다시 세상의 빛을 보려면 내년 5월이 돼야 합니다.

5월 경기도 상설할인매장으로 나가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인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다음은 태어난 지 3년차 옷들이 올라가는 ‘5만원 균일가’라는 무대에 올려집니다.

 주인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안산 소각장으로 가야 합니다.

 

 ◆화려한 탄생 저의 탄생은 화려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고급 원단으로 태어났습니다.

 옷의 질(質)과 스타일을 주도하는 것은 원단입니다.

 저는, 가장 유명하다는 파리견본시장에 나온

이탈리아 원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야드(0.9144m)에 2만6000원이나 하는 고급 원단입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내수 원단 가격은 수입 원단과 비교해 40~50% 정도에 그칩니다.

원단이 수입된 이후, 저는 서울 동대문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만들어졌습니다

. 고급 여성복이기 때문에 ‘선생님’이라 불리는 봉제사 등 50여명이 저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공장 바닥에는 옷감과 실밥이 어지럽게 널려 있지만, 직원들은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공장 사장님이 가격표를 달아주었습니다.

48만8000원. 저처럼 고급 여성복의 가격은 대략 제조원가의 5~6배수로 정합니다.

제가 만들어지기까지 제조원가는 8만원 정도가 들었습니다.

 

캐주얼복은 가격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대부분 3배수를 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마담복이라고 불리는

‘디자이너 선생님’ 옷은 많게는 6배수를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가에 비해 왜 이렇게 비싸게 받냐고요?

 

가격에서 비중이 큰 것은 원단과 임가공비,

 백화점 수수료를 꼽고 있습니다.

 미국 등 외국 백화점은 바이어들이 업체로부터

옷을 직접 사들여 매장에서 판매합니다.

 수수료가 우리나라만큼 높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업체들이 판매가 잘 되지 않을 것에 대한 위험도 스스로 져야 하기 때문에, 원가에다 배수를 높게 잡습니다.

 대략 백화점에서 50% 정도 팔린다고 생각하고 가격을 매기지요.

 

외국 백화점의 경우 수수료가 높지 않으니,

옷값도 우리만큼 비싸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는 고급 원단을 구할 수 없는 점도 여성 옷이 비싸진 이유입니다.

업체들도 옷값의 거품을 빼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업체들도 ‘사실 우리나라 여자 옷은 너무 비싸다’고 하더군요.

공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스팀 다림질을 마치자, 저는 금세 날아갈 것 같은 아름다운 한 벌의 원피스로 완성됐습니다.

 드디어 데뷔! 완벽하게 단장한 저는 작년 5월 유명 백화점 매장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판매가 좋지 못했습니다.

영업 담당자는 “백화점에서 50%는 팔려야 하는데…

”라며 혀를 찼습니다.

 

◆백화점에서 팔지 못하면 1년 뒤 50% 할인

 판매=백화점에서 팔리지 못한 저는 회사의 경기도 물류센터에서 1년간 숨죽이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올해 5월 1년차 상설할인매장에 나왔습니다.

가격은 50% 할인. 가격이 24만4000원으로 깎였습니다.

 

 3개월간 매장에 걸려 있었지만, 여인들은 나를 몇 번 입어보거나 들춰보기만 할 뿐 지갑을 열진 않았습니다.

 2년차 상설매장에 가면 다시 50% 할인된 가격에 팔립니다.

그것도 안 되면 1년을 기다렸다

3년차 균일가 행사로 가는 겁니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마지막엔 소각장행입니다.

 

 고가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땡처리’는 되지 않고,

 소각되는 겁니다.

 영캐주얼로 불리는 일부 저가(低價) 여성 옷은 1차 상설할인매장을 거친 뒤, 바로 ‘땡처리’ 되기도 합니다.

업체에서 1장당 600원만 받고 넘기는 식입니다.

 땡처리업자들이 할인점 등에서 판매대에 쌓아 놓고 파는 옷 중에는 이런 물건이 많습니다.

 아니면 인터넷쇼핑몰에서 일부 땡처리 제품이 팔린다고 하더군요.

 

할인점이나 인터넷에서도 팔리지 못하면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등으로 ‘수출’됩니다.

 멀리 떠나는 겁니다.

 누구는 저 같은 여자 옷의 일생을 여자의 일생에 빗대기도 합니다.

 모두 화려하게 태어나지만, 결과는 사뭇 다르지요.

 아무튼 여자 옷의 일생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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