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한 치매
치매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어느 집엔 냄비가 남아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가스불에 냄비를 올려놓고는 다 타들어가도록 놔두곤 한다.
아파트 숫자키 번호를 ‘1234’나 ‘1111’로 해놔도 소용없다.
장판을 뜯어먹어 잇몸 성할 날 없는 아버지, 함께
저녁밥 잘 먹고 나선 “이제 퇴근했냐?”는 어머니,
장롱에 든 속옷 다 헤쳐놓곤 “누가 내 옷 훔쳐갔냐”는 시어머니….
치매가족협회 홈페이지(www.alzza. or.kr)엔 그런 사연이 가득하다.
▶치매가 무자비한 건 겪어봐야 안다.
밥 한 끼 드시게 하는 것도 전쟁이다.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렸는데 옷은 아들 것이 다 젖어버린다.
땀에 젖어서다.
툭하면 가출하니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는 집도 있다.
진짜 무서운 건 그 병이 5년, 10년 기약이 없다는 것이다.
돈과 인내가 다 바닥나야 끝나는 수가 많다.
누가 모시느냐로 형제간 의가 상했다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 으레 그러려니 한다.
▶레이건은 “인생의 황혼으로 가는 여행을 가겠다”며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고백했다.
찰턴 헤스턴은 “기억이 남아 있을 때 작별하고 싶다”며
비디오테이프로 기자회견을 했다.
어느 어르신이 아들에게 땅 판 돈을 줬다.
그 어른의 전 재산이었다.
“나중에 정신이 딴 데 가더라도 부탁한다”.
치매는 치매에 빠져드는 노인에게 제일 공포스럽다.
자기와 주변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게 될 줄 알기 때문이다.
▶오늘 21일은 ‘세계 치매의 날’이다.
꼭 100년 전인 1906년 독일 의사 알츠하이머가
노망 걸린 50대 여자를 4년 반 추적 조사해 뇌 신경조직의 손상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노인의 저주’로 불리는 이 병은 거의 낫는 법이 없다.
보통 8~10년, 길게는 20년 동안 아주 천천히 죽음을 향해
다가갈 뿐이다.
우리나라에만 그런 노인이 38만 명쯤 된다고 한다.
▶치매 노인에게 가족의 보살핌만큼 좋은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이 결딴나지 않고도 모실 수 있는 집은 많지 않다.
전국에 노인요양시설이 540군데 있지만
정원을 다 합쳐봐야 3만5000명밖에 안 된다.
민간시설엔 한 달에 100만~250만원을 내야 한다.
공공시설엔 극빈층만 들어갈 수 있고 그것도 대기번호표를 들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치매를 개인이나 가족이 알아서 감당하라고 하는 건 잔인하다.
국가가 요양시설을 넉넉히 갖춰주는 게 시급하다.
한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