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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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나무를 보네

앤 셜 리 2010. 6. 19. 16:32

한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은 한 생명을 기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무를 키우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힘들다. 어릴 적 고향 텃밭 구석에 가족과 감나무를 비롯해 크고 작은 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아버지 따라 연필깎이 칼로 감나무 접붙이기를 하다 손 베인 기억을 떠올리면 등골이 오싹하다.

그런데 그 당시 심은 나무는 지금 거의 살아 있지 않다. 내가 심은 나무는 왜 일찍 생을 마감했을까? 몇 그루는 곡물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생을 마감했지만, 적지 않은 나무는 나의 무지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나는 나무를 어떻게 심는 지를, 나무를 심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30대 초반에 중국 당나라 시인 유종원(柳宗元)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駝傳)’을 읽고서야 알았다.

유종원이 일러주는 나무 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나무의 천성을 잘 따르고, 나무의 본성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유종원의 나무 심기는 결국 한 존재가 능력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예컨대 키 큰 나무는 뿌리가 깊게 내릴 수 있도록, 가지가 마음껏 뻗을 수 있도록 터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다 자랄 때까지 한 없이 기다려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나무와 다를 바 없다.

나무는 인간 삶의 기본이다. 나무 없이 인간이 살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나무가 근본임을 알 수 있다. 근본을 의미하는 ‘본(本)’은 나무 밑동에 표시한 것을 뜻한다. 나무를 뜻하는 ‘수(樹)’ 역시 근본을 의미한다. 노자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박(樸)’도 근본을 뜻한다.

나는 이러한 나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경전에 나오는 성현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학기마다 학생들과 나무를 안고 수업한다. 공자와 노자가 자신의 사상을 나무에서 찾았듯이, 나 역시 학생들과 나무를 안고 이치를 깨닫는다. 일종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나무를 안아보라고 하면 처음엔 모두 머뭇거린다. 그들에겐 아주 낯선 일이고, 남이 볼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안고, 두 번 안고 나무를 만지다 보면 나무가 어떤 존재인지 조금씩 알 수 있다. 이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무 안는 게 결코 낯설지 않다. 나무를 안아본 사람들은 나무의 겉과 속을 동시에 안다.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지를 나름대로 고민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집을 나선다. 그들이 떠나는 것은 대부분 쉬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어떻게 쉬는 게 좋을까. 나는 나무와 더불어 쉬는 게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 한자의 쉴 ‘휴(休)’는 사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을 본뜻 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 자에는 ‘아름답다’는 뜻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나무에 기댄다고 무조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모습은 결코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다. 그래서 쉴 휴 자에는 ‘검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아름다우려면 나무처럼 검소하게 살아야만 한다.

나는 나무에서 수도승 같은 자세를 느낀다. 나무는 그 어떤 자도 구원할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자신만을 구원할 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생명체는 사실 다른 존재를 구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 존재는 스스로 구원할 뿐이다.

나무는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인간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 뿐이다. 이 세상에 열심히 살지 않고 살아남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나무를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하면 착각이다. 나무는 가장 능동적인 존재이다. 그 어떤 기대도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자, 바로 나무이다. 이런 자만이 창조적이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나무를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는 자주 누워서 나무를 본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나무 곁에 누운 자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내가 나무를 누워서 보는 것은 나무가 어떻게 서 있는지를, 나무가 어떻게 수십년에서 수천년 동안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내가 나무를 누워서 보는 것은 자신을 바닥까지 낮추면 한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워서 나무를 보면 덤으로 한 그루의 나무에서 천국과 극락을 맛볼 수 있다.

나는 나무이름을 갖고 있다. 요즘 나는 학생들과 주위 분들에게 ‘나무이름 갖기 운동’을 펼친다. 나는 명함에도 호적상의 이름 외에 나무이름을 함께 적고 있다. 나무이름을 갖고 있는 분들과는 나무이름으로 부른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이름을 짓게 한 후 다음 시간에 ‘감나무’, ‘소나무’ 등과 같이 나무이름으로 출석을 부르기도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나무이름을 갖도록 권하는 것은 이름이 한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고, 이름을 아는 순간 나무를 사랑할 수 있는 일종의 문이라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로 나무 이름으로 부르면 나무를 생명체로 인식해서 식물이 인간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몸소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쥐똥나무’이다. 이 나무는 열매가 쥐의 똥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주택 근처에서 울타리로 많이 심고 있을 만큼 키 작고 잎 떨어지는 아주 흔한 나무이다. 나도 쥐똥나무처럼 키 작고 아주 흔한 얼굴이다. 나서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미련스럽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