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성역이었습니다.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또는 아껴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종교도 문화현상의 하나입니다.
다른 모든 문화현상처럼 비판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귀하게 여기려는 태도는 존중하되 종교의 잘잘못을 냉정하게 살피는 공론화는 꼭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흔히 다종교 사회이면서도 평화롭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꼭 그렇게 보지만은 않습니다.
종교문제는 워낙 민감해 모두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리기 때문
에 표면적으론 평화롭지만 속으로는 갈등요소도 잠복해 있다고 봅니다.
7대 종교 수장(首長)들이 정기적으로 모임과 행사도 갖지만 그런 화합이 평범한 신도들 사이에도 이뤄져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진심으로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종교문제의
공론화가 필요합니다.”
―개신교의 국내외 전도·선교방식에 대해서도 비판이 많았습니다.
“개신교는 우리 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엔 의료·교육을 비롯한 선진문화를 도입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섰고, 특히 반상(班常)구조를 철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일종의 ‘문화적 사건’을 주도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급성장하는 가운데 문제점도 생겼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가 늘 지적됐습니다.
최근 통계 조사에서는 교인 수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등 ‘비호감’이 늘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7일 개신교 중진 목회자들이 겸손하고 현지인과 문화를 존중하는 선교를 촉구
(▶본지 28일자 A2면 보도)한 것을 보고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과거 19세기 서구 열강의 선교는 ‘지배하고, 통제하며, 정체성을 바꾸는’ 식민지정책과 유사했습니다.
21세기의 선교는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는 관계를 창조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대안이 있겠습니까?
“10여 년 전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사례를 말씀드리지요.
다종족, 다언어, 다종교 사회인 인도네시아에는 ‘종교를 믿는 자유는 인정, 포교는 불용(不容)’이란 원칙이 있답니다.
그런데 한 시골 교회에 갔더니 지도에 최근 3년 사이에 세워진 교회 표시가 여럿 있었습니다.
‘선교가 불법인데 어떻게 이렇게 교회를 세웠느냐’고 물었더니 현지인 목사는 ‘바로 그 법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선교 자체가 불법이니 예수나 성경 이야기는 하지 않고 상(喪) 당하고, 굶고, 어려운 이웃들을 말 없이 도왔더니 그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저는 선교의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의 종교 간·문명 간 평화와 화해는 어떻게 이뤄질 것으로 보십니까?
“역사의 방향은 다원문화의 시대로 흘러가는 듯합니다.
이런 판에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수렴, 통합해야 평화가 유지된다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로 통합되기에는 현재의 세상은 너무 다양하고 무수한 절대적 가치가 산재해 있습니다.
미국이 현재 당면한 딜레마가 바로 통합 욕구 때문입니다.
과거엔 ‘출발은 달랐지만 한 점으로 모아진다’는 것이 종교에 관한 평화의 개념이었다면 이젠 ‘출발이 다르면 종착점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각기 다른 채 함께 어울리는 것이 평화라는 뜻이지요.
다원화된 세상에서 과거의 단원적인 사고를 고집하고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뒤에 비친 그림자에 매달려 눈앞의 빛을 놓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도 단원적 사고가 남아 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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