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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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시 나의 인생] 강릉 - 민속학자 황루시

앤 셜 리 2010. 9. 6. 20:02

관동대 교수 황루시는 경포호 아래 초당마을에 산다. 집을 오가다 보면 고가(古家) 선교장 같은 명소 앞에 여행자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다. 그는 차를 세우고 행선지가 맞으면 태워준다. 함께 가면서 강릉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는 말했다. "나는 강릉 사람이니까, 방문객에겐 우리 모두가 가이드이니까."

경포호 남쪽 허난설헌 생가터엔 벚나무 거목들이 하늘 가득 때늦은 꽃비를 뿌리고 있었다. 아니 눈발처럼 하얀 꽃눈이다. 황루시는 이곳에 일과처럼 산책 나온다. 집에서 걸어 10분이다. 고즈넉한 양반집 마당을 거닐며 여자로 시대를 잘못 만난 시인 난설헌을 생각한다. 바로 옆 호반 청정한 소나무 사이를 걷고, 다시 10분 나가 경포바다에서 깊은 숨을 들이쉰다.

그는 "전생에 무슨 착한 일을 했기에 이렇게 좋은 데서 사나 싶다"고 했다. 난설헌이 노래했던 그 강릉의 삶이다. '집은 강릉땅 돌 쌓인 강가에 있어/ 문앞을 흐르는 물에 비단옷 빠네/ 아침이면 한가로이 노 매어두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 넋 잃고 바라보네.'

황루시는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무속(巫俗)을 공부하던 1977년 초여름 강릉에 와 처음 본 남대천변 풍경을 잊지 못한다. 드넓은 모래벌판 뙤약볕에 하얀 천막들이 넘실댔다. 무당과 농악대, 약장수가 여기저기 마당을 벌이고 밥장수 술장수 떡장수 이불장수 옷장수, 온갖 장사치들 호객소리가 떠들썩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어깨를 밀며 미어터지게 떠다녔다.

굿판에 빼곡히 앉은 할머니들은 머리에 향기로운 궁궁이풀을 꽂은 채 무당 노래에 취해 있었다. 모시옷 차려입은 할아버지들은 농악마당에서 막걸리 한잔과 꽹과리 장단에 신명풀이를 했다. 아이들은 물방개를 띄우는 야바위판에 고개를 들이밀고, 낮술에 얼근한 사내들이 씨름판을 기웃거렸다. 옛날 얘기 책 파는 이는 돗자리에 수백 권을 깔아놓고 소리 내 책을 읽었다. 사람들은 책 살 생각도 않고 책장수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단오제는 충격이었다. 우리에게도 축제가 있었구나, 축제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강릉은 황루시에게 가슴 뛰는 공간이 됐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단오제 구경을 왔다. 공부라는 것도 잊고 정교하기 그지없는 단오굿 가락을 신이 나서 채보(採譜)했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무당들의 연희와 삶을 기록했다.

학생 시절이라 닷새씩 머물다 보면 돈이 떨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라고 불렀던 단오굿 인간문화재 박용녀 할머니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곁에 앉은 후계자 신석남 할머니에게 눈짓을 했다. 신 할머니는 치마를 들춰 지금 돈으로 2만~3만원을 쥐여주곤 했다. 하루쯤 더 묵을 수 있는 돈이었다.

황루시는 서울 토박이였다. 아버지 황영빈은 영화평론가·시나리오작가·제작자였다.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와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 두 주제가로 유명한 '꿈은 사라지고'(1959년)가 첫 제작 영화다. 시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딸 이름을 실 루(縷)에 글 시(詩)로 짓고 '비단 폭에 쓰인 시'라고 풀이해줬다.

1988년, 박사학위를 받은 이듬해 서른일곱 황루시가 얻은 첫 전임 자리가 또 우연찮게 관동대 교수였다. 전국을 다니며 숱하게 답사한 굿 중에서도 단오제의 도시에 자리잡은 걸 보면 강릉은 갈데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17년째 단오제 기획과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어린이 없는 단오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만화교재를 만들어 학교마다 돌렸다. 야바위판들을 축제장 밖으로 몰아냈다. 대관령에서 모셔 내려온 신(神)이 강릉시내 여(女)서낭과 만나 남대천까지 가는 한 시간 길을 시민 길놀이로 키웠다. 소원을 써넣는 등(燈) 3000개를 3000원씩에 팔아 신의 행차를 호위하게 했다. 그 자체가 장관이다.

시민들은 단오 한 달 전, 신의 술(神酒) 빚을 때부터 함께한다. 옛 마을 동제(洞祭)에서 쌀을 추렴했듯 4㎏ 들이 주머니를 돌렸더니 100가마 넘게 모인다. 그걸로 막걸리를 빚어 길놀이부터 단오장 내내 나눠준다. 그는 2004년 단오제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올리는 신청자료 작성을 맡아 등재를 성사시켰다.

황루시는 강릉 옛 이름을 딴 임영민속연구회에서도 20년을 활동하며 세 차례 회장을 지냈다. 이 민간 연구회를 그는 "강릉의 내 가족"이라고 불렀다. 강릉 사람들이 그를 강릉 사람으로 받아들인 곳이다. 그는 말씨도 어느덧 강릉 억양으로 바뀌었다.

강릉 사람들은 고집이 세다. 다른 지역 축제는 대학 전문가들이 맡아 하지만 강릉은 다 강릉 사람들이 한다. 우리 것 우리가 제일 잘 안다는 자부심에서다. 답답할 때도 있지만 황루시는 그게 맘에 든다. 그런 게 진짜 지역 축제다. 강릉 사람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단오제에 매일 나온다. 비가 억수로 퍼부어도 길놀이에 온다. 그는 "그게 강릉의 힘이고 그런 문화가 사람들을 자유롭고 여유롭게 만든다"고 했다.

그는 얼마 전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은퇴한 뒤 9인승 밴을 사서 문화관광 가이드를 할 생각이다. 가족이나 외국인 관광객을 터미널에서 태운 뒤 대관령 서낭당부터 전통문화 현장에 데리고 다니며 맛난 음식 먹이고 집에서도 재울 계획이다. 몇 년 해서 장사 된다는 걸 증명해 보이면 젊은이들도 따라 할 것이다.

황루시는 산책 나올 때마다 집 앞 강릉고에서 야구부 학생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본다. 기특하고 예쁘다. 은퇴하면 후원회장이 돼 1년에 두어 차례 고기파티를 해주고 싶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강릉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