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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삶 (고 이은성 )

앤 셜 리 2013. 12. 24. 17:31

고집불통 아버지의 삶

글 : 이승윤

고(故) 이은성 자제

2007년3월호 한국방송작가협회 웹진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프로필 사진, 작품 원고 가족의 회고....퀵서비스로<방송문화>과월호가 도착했다.

기출문제를 푸는 심정으로 여러 작가 선생님들에 대한 가족의 회고담을 읽는다.

여러 선생님들의 모습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있음을 본다.

기사 여기저기 반가운 분들도 계신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후 경황이 없는 와중에 손수 편지로 위로

해 주셨던 한운사 선생님, 어느 자리에선가 따듯이 손을 잡아 주셨던 신상일 선생님 신촌 복집에서의

이희우 선생님 아버지 생전엔 한번도 뵙지 못했지만 다른 인연으로 만나 같이 두루뫼 박물관도 가고

천렵도 다녔던 강위수 선생님 .............

 

이젠 내 차례다 첫줄부터 막막하다

일단쓴다. 경북 예천 출생 아버지의 이전 이력서나 사후 모든 프로필에는 경북 예천 출생으로 되어있다

예천은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엄밀히 말해 아버지의 출생지는 일본 동경. 일제 말 징용 나가신 할아버지 탓이다

그리고 해방 후 귀국하신 뒤 자리를 잡은 곳은 충남 대전 당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었단다.

그저 비어있던 폐가나 다름없는 집이었지만 아버지 성장기의 대부분은 여기에 빚지고 있다

80년대 중반까지 있다 80년대 중반까지도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던 뽐뿌와 쪽마루와 이발소에나

걸려 있음직한 커다란 수박 등속의 과일 그림이 생생하다

결국 지금 누워 계신곳도 대전 언저리 돌아보면 아버지의 심정적인 고향은 대전이었던 듯 싶다

동문도 고향 친구도 없는 아버지가 살아 생전 많이 외롭지는 않으셨는지...

87년 겨울 아버지를 따라나선 보라매 공원에서의 백기완 선생 유세에서 나는 아버지의 고향이 북쪽이 아닌가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얼마전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벌써 올해가 아버지의 19주기이다

산소에 다녀오는길에 어떻게 만났어요? 그 시절 아버지는 어땠나요?

처음 방송일은 어떻게 시작 하셨어요? 등<방송문예> 원고 거리가 될만한 내용들을 어머니께 여쭤 보았다

대부분 들은 얘기 들이었지만 "그랬어? 정말? 새로운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버전이든 간에 괴팍하고 남의 말 잘 듣지 않는 고집불통 정도로 요약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중 요즘 시세와 어울리는 한 대목 한참 강남 개발이 붐을 이루던 시절 믿을만한 정보원들을 물리치고

아버지는 지금 살고 있는 서대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하고 당시 여러 작가 선생님들이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 왈 그때 너의 아버지 내말만 들었어도... 원통해 하시지만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걱정마라 난 죽을때까지 쓸거니까" 하셨단다 그 약속은 지키셨다 그런데 너무 빨리 가셨다 향년 51세.

 

막내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나와는 많이 다른 나의 동생이 자랑 스럽다

영화일을 하는 동생의 평판은 괴팍하고 남의 말 잘 듣지 않는 고집 불통이다 그래서 동생의 가는 길이

더디더라도 할 수 없다 그 피가 어디 가나?

 

운전 면허를 따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에서 여의도 인쇄소까지 원고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퀵 써비스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니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떤날은 새벽에 일어나 몇번싹 왕복 운행을 하기도 했다

다 쓴 원고를 주실 듯 읽어 보시다간 북북 찢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이런 날은 대개 날밤이다

난 입이 댓발이나 나와 진작좀 쓰시지 왜 이렇게 여러 사람을 고생 시키시나 했었다 방송일은 아니지만 나또한 직업상

원고 독촉을 받을때마다 한편으론 안도한다 나도 닮았다! 그 피가 어디 가냐고!

 

대개 지난 세월엔 관대해지게 마련이다

추억하고 그리워 한다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슬픔을 버틸 수 있는건 조금씩 잊혀지고 무뎌지기 때문이다

그 상자 안에는 희망과 함께 망각이 있엇음이분명하다 간절히 원하지만 아버지 삶을 온전히 복기(復棋) 할 수 는 없다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여러 선생님들께다시 한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