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겨울 다산(茶山)이 강진 유배지에 도착하자,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나없이 손사래를 치며 문을 걸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활짝 열린 출세의 문 앞에 섰던 다산이었다. 그런 그가 이 낯선 땅에 당도하여 모든 사람의 외면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 심경은 어떠했을까? 화창한 봄날 꽃이 만발한 곳에 자리를 깔고 따스한 햇살에 기분 좋게 깜빡 졸다가 깨어났다. 하늘은 음산하고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낯선 풍경, 질척거리는 길 한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세속적 보상도 없는, 오직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연구를
다산은 동문 밖의 술집에 거처를 정하고 4년을 머물다가 1805년 겨울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그리고 1806년 이학래(李鶴來)의 집으로, 1808년 봄에부터 다산에서 지낸다. 이곳 다산이 오늘날 남도를 답사하는 답사객들이 단골로 찾는 강진의 다산초당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1818년 8월 해배될 때까지 11년을 지낸다.
18년은 긴 시간이다. 여느 사람 같으면 정적(政敵)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을 삭히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죽이면서 몸과 마음을 소모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면 낯선 환경을 괴로워하다가 병을 얻던가. 하지만 다산은 이내 귀양살이를 창조적 생활로 바꾼다. 특히 다산초당에서 그는 안정을 찾는다. 초당에서 연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암자 두 채를 지어 서적 천여 권을 비치하고 학문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초당 시절 다산은 엄청난 연구물을 쏟아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의 중요한 저술은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연구자로서 나는 다산이 남긴 그 방대한 업적에 실로 경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더 경이로운 것은,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학문에 정진했던 그의 자세다. 알려져 있다시피 다산은 강진 읍내에서 이학래와 황상(黃裳) 등의 제자를 키웠고, 이들이 다산의 저술활동을 도왔던 것이다. 다산의 그 방대한 업적은 이들 제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산은 제자들과 함께 자신을 귀양지로 몰아넣은 시대의 병고(病苦)를 치유하는 연구에 전념하였다. 궁벽한 귀양지의 다산과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알기나 하였으랴. 아니 그들은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굳은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다. 그 신뢰 위에서 사제(師弟)는 학문하는 행위에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연소(燃燒)했던 것이다. 나는 다산과 그 제자들이 초당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치게 마음이 즐거워진다.
다산의 연구 환경이 좋았을 리 없다. 초당에 책 천 권을 비치했다고 했지만, 그 천 권이란 당시 서울의 유수한 장서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몇 만 권의 책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보상도 없었다. 그 연구로 벼슬을 한 것도, 돈을 번 것도 아니었다. 오직 세상에 대한 의문을 풀고, 세상의 병고를 치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저 진지하고 웅장한 업적을 낳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진지함과 자발성이 한없이 부럽다.
연구를 위한 연구비인지? 연구비를 위한 연구인지?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최근 대학의 연구환경도 따라서 좋아졌다고 한다(나는 사실 느끼지 못한다). 그 중요한 척도가 연구비다. 공학이나 자연과학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겠지만, 인문학 쪽도 연구비의 단위가 사뭇 크다. 대학마다 외부 연구비를 많이 수주하라고 독려를 하고, 연구비를 많이 따는 대학이 우수한 대학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모두들 연구비를 따는 데 힘을 기울인다. 대학과 교수들이 ‘연구비’에 몰두하다 보니, 종종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된다. 연구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연구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를 타기 위해 어떤 연구 주제를 ‘만든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학문적 화두를 풀기 위해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 즉 ‘돈’을 받을 방법을 ‘연구’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 큼직한 연구비, 즉 ‘돈’이 떨어지면 그것의 운용과 배분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어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연구에 대한 진지함과 자발성은 어디로 증발했는가. 강진에서 다산이 이루었던 저작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세속적 보상도 없는, 오직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연구를
다산은 동문 밖의 술집에 거처를 정하고 4년을 머물다가 1805년 겨울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그리고 1806년 이학래(李鶴來)의 집으로, 1808년 봄에부터 다산에서 지낸다. 이곳 다산이 오늘날 남도를 답사하는 답사객들이 단골로 찾는 강진의 다산초당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1818년 8월 해배될 때까지 11년을 지낸다.
18년은 긴 시간이다. 여느 사람 같으면 정적(政敵)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을 삭히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죽이면서 몸과 마음을 소모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면 낯선 환경을 괴로워하다가 병을 얻던가. 하지만 다산은 이내 귀양살이를 창조적 생활로 바꾼다. 특히 다산초당에서 그는 안정을 찾는다. 초당에서 연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암자 두 채를 지어 서적 천여 권을 비치하고 학문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초당 시절 다산은 엄청난 연구물을 쏟아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의 중요한 저술은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연구자로서 나는 다산이 남긴 그 방대한 업적에 실로 경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더 경이로운 것은,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학문에 정진했던 그의 자세다. 알려져 있다시피 다산은 강진 읍내에서 이학래와 황상(黃裳) 등의 제자를 키웠고, 이들이 다산의 저술활동을 도왔던 것이다. 다산의 그 방대한 업적은 이들 제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산은 제자들과 함께 자신을 귀양지로 몰아넣은 시대의 병고(病苦)를 치유하는 연구에 전념하였다. 궁벽한 귀양지의 다산과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알기나 하였으랴. 아니 그들은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굳은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다. 그 신뢰 위에서 사제(師弟)는 학문하는 행위에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연소(燃燒)했던 것이다. 나는 다산과 그 제자들이 초당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치게 마음이 즐거워진다.
다산의 연구 환경이 좋았을 리 없다. 초당에 책 천 권을 비치했다고 했지만, 그 천 권이란 당시 서울의 유수한 장서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몇 만 권의 책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보상도 없었다. 그 연구로 벼슬을 한 것도, 돈을 번 것도 아니었다. 오직 세상에 대한 의문을 풀고, 세상의 병고를 치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저 진지하고 웅장한 업적을 낳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진지함과 자발성이 한없이 부럽다.
연구를 위한 연구비인지? 연구비를 위한 연구인지?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최근 대학의 연구환경도 따라서 좋아졌다고 한다(나는 사실 느끼지 못한다). 그 중요한 척도가 연구비다. 공학이나 자연과학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겠지만, 인문학 쪽도 연구비의 단위가 사뭇 크다. 대학마다 외부 연구비를 많이 수주하라고 독려를 하고, 연구비를 많이 따는 대학이 우수한 대학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모두들 연구비를 따는 데 힘을 기울인다. 대학과 교수들이 ‘연구비’에 몰두하다 보니, 종종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된다. 연구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연구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를 타기 위해 어떤 연구 주제를 ‘만든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학문적 화두를 풀기 위해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 즉 ‘돈’을 받을 방법을 ‘연구’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 큼직한 연구비, 즉 ‘돈’이 떨어지면 그것의 운용과 배분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어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연구에 대한 진지함과 자발성은 어디로 증발했는가. 강진에서 다산이 이루었던 저작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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