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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

이옥봉(李玉峰)은 누구인가

앤 셜 리 2014. 7. 26. 17:30

이옥봉(李玉峰)은 누구인가

 

전주 이씨. 본명 숙원. 조선중기 16세기 후반 선조대왕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 옥봉은 그녀의 호 입니다. 비록 첩의 딸이었지만 아버지는 고위관리였고 집안은 왕족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글과 시를 배웠는데 글재주가 뛰어나 그녀가 지은 시는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 신분 때문에 첩살이밖에 할 수 없음을 알자, 옥봉은 결혼할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가 내노라하는 시인묵객들과 어울리며 지냈습니다. 옥봉의 시는 재기발랄하고 참신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조원이라는 젊은 선비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옥봉의 사랑을 알게 된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찾아가 딸을 첩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미 결혼한 몸인 조원은 거절했습니다. 딸을 너무도 사랑했던 이봉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결국 이준민의 주선으로 옥봉은 소원을 이룹니다.

 

자기 딸을 첩으로 들여달라고 사위될 사람의 장인에게 청을 하고, 장인은 자기 딸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을 첩으로 추천하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조선 사대부들의 행태지만, 어쨌든 옥봉은 결혼 후 다른 사대부의 첩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쓴 시 한편으로 불행한 '필화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 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수를 써 보냈습니다.

 

洗面盆爲鏡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삼아 쓰옵니다.

妾身非織女   첩의 신세가 직녀 아닐진대

郎豈是牽牛   낭군께서 어이 견우가 되리이까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물로 기름을 삼는다는 것은 청렴한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고˝ “이 몸이 직녀 아닌데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리오” 라는 말은 견우(牽牛) 즉 소를 끌어간 사람이다. 내가 직녀가 아닌 것처럼 남편이 견우 즉 소를 끌어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시를 본 파주목사는 산지기를 석방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알게 된 조원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옥봉을 내친 것입니다. 조원하고 함께 산지 10년쯤 되었을 무렵의 일입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정을 나눈 여인을 조원은 어찌 그리 매정하게 단칼에 내쳤을까요?

 

처음 첩으로 들였을 때 시를 짓지 말기로 한 언약을 깨뜨려서 내쳤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지만 믿기 어렵습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그녀가 간간이 시를 지은 흔적이 있는데다가, 시와 철천지 원한을 맺지도 않은 선비가 부인이 시를 썼다고 이혼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공적인 판결에 벼슬아치의 부인이 끼어들어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된 것을 용납하기 어려워서일까요? 조원의 꽁한 선비 기질로 보건데 타당한 이유일 듯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판결을 크게 어지럽힌 것도 아니고 탄원서를 시로 써준 정도에 지나지 않는 데, 그걸 이유로 이혼을 하다니 지금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도 그런 남편을 이옥봉은 밤마다 꿈속에서 그리워합니다.

 

若使夢魂行有跡   만약 꿈속 혼이 다닌 길에 자취가 남는다면.

門前石逕半成砂   문 앞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조원이란 남자의 졸렬한 행동은 이런 사랑을 받을 가치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데도 이옥봉은 우리가 모르는 조원의 또다른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나 봅니다. 그에게 버림받은 뒤 한강변 뚝섬의 오두막에서 미친 듯 울며 밤마다 시를 쓰는 여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사랑시는 이렇게 하여 헤어진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은 슬픔이 가득찬 이별과 그리움의 시가 옥봉 시의 주류를 이룬다.

 

夢魂 몽혼

 

近來安否問如何   요즘 안부를 묻습니다 당신 잘 계신지요

月到紗窓妾恨多   달 비친 비단 창가에 제 슬픔이 깊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   만약 꿈속 혼이 다닌 길에 자취가 남는다면.

門前石逕半成砂   문 앞 돌길이 반쯤은 모레가 되었을 거예요.

 

위의 시는 바로 헤어진 남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잘 그리고 있다. 만약 남편을 찾아헤맨 넋이 흔적이 있었더라면 남편이 계신 문 앞의 돌길이 허물어져 모래밭이 되었을 것이라는 결구에 시인의 애절한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평생의 이별은 뼈아픈 한이 되어 끝내 병이 되었는데 술로도 고치지 못하고 약으로도 고치지 못하게 된다. 다음 시 역시 별한의 애절함을 노래한 것이다.

 

閨情 규정

 

有約郞何晩   약속해놓고 어찌 이리 늦으시나?

庭梅欲謝時   뜨락에 핀 매화 다 떨어지려 하는데

忽聞枝上鵲   홀연히 가지 위의 까치 소리에

虛畵鏡中眉   부질없이 거울 속의 눈썹 그린다오.

 

매화 피는 봄에 다시 만나자 약속하였건만 뜨락의 매화 다 떨어지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님은 아니 오신다. 갑자기 나무에서 우는 까치 소리를 듣고, 속언에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 오는 징조라 하였거늘 혹여 반가운 님이 오시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거울을 보고 단장을 해 본다.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심이 시 전체에 잘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구의 ‘虛’자가 그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대개 옥봉의 시는 이처럼 이별과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 많으나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寧越道中 영월도중

 

五日長關三日越   닷새 거리 긴 고개를 사흘에 넘어서자

哀辭唱斷魯陵雲   노릉의 구름 속에서 슬픈 노래도 끊어지네

妾身亦是王孫女   첩의 몸도 또한 왕손의 자손이라서

此地鵑聲不忍聞   이곳의 접동새 울음은 차마 듣기 어려워라

 

시제는 <寧越道中>이다. 비운의 임금 단종이 묻혀 있는 영월을 지나면서 읊은 시이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왕실의 후예였으니 옥봉도 역시 왕손의 자손이라 두견새 소리를 듣자니 단종이 당했던 그 때의 참사가 생각나 차마 듣기 어렵다고 한다. 이 시는 사어가 씩씩하고 힘차며 처량하면서도 아름다우며 비분강개하여 충신절사의 시 같다. 허균이 옥봉의 시를 淸健․淸壯하다고 하면서 여성의 화장기가 없어 가작이 많다고 평가하였는바 바로 이 시를 두고 이른 것이다.

 

옥봉은 남편 조원과 헤어진 후 시로써 自娛하며 여도사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조원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으며 임진왜란을 만나 정절을 지키다 죽었다한다. 옥봉의 이름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녀가 지은 시들을 뽑아서 <列朝詩集>속에 싣고 ‘閨秀 玉峰 李氏’라 칭하였다하니 당시 옥봉의 문명은 이매창, 황진이, 허난설헌에 뒤지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뚝섬 근처에 방 한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 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 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읊었다. 더 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閨恨 규한 / 李 玉 峰

 

平生離恨成身病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

衾裏泣如氷下水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   밤낮을 내가 되어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

 

냉정하기 짝이 없는 조원에게 바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저 시들을 이옥봉은 아낌없이 쏟아놓고 세상을 떴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난리통에 죽었으려니 짐작할 뿐, 정확한 생사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 사랑에 꺾인 애달픈 시심

 

조선 인조 때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 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온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지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 밖에 못함을 알게 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 옥봉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시구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조원이란 선비를 사랑하여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첩살이가 싫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진 모양이다. 한데, 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했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라면서. 옥봉은 맹세했다.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 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수를 써 보냈고,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뚝섬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으로서는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읊었다. 더 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 마음껏 시심을 펴보려 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의 시로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었나 보다.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규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여성은 천시하거나 사회적 보호밖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셈 이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자신의 삶은 결국 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면서. / 박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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