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창작

생혼(生魂)

앤 셜 리 2021. 5. 31. 09:15

얼릉 눈감지 말아라.

햇볕 잘 드는 주택 살 때는
5.6월, 홍란이 필 때면
붉은 꽃대가
쏙쏙 올라와 피고 지고 마당이 훤했는데
땅속에선 달래 알 매달듯 동글동글
번식도 잘했는데
아파트로 이사 오고는
옹색한 환경에
번신력은 고사하고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했다.

우리 아파트는 동남 향이라 해 뜨는 새벽 시간이 젤 밝다
햇빛 보려면 주인이 부지런해야 한다
아니면 해가 지붕 위로 올라가 해가 질 때
건너편 창가에 잠깐 비치다 서산 넘어 사라진다.
그늘 좋아하는 화초에겐 안성맞춤인데
강렬한 빛 좋아하는 홍난에겐
열악한 환경이다.
내 정성에 어쩌다 핀다 해도 꽃대는 연약하고
빛바랜 색은 외로워 보였다.

주인이 미스터 트롯, 넷플릭스 영화나
다큐에 홀려 늦잠 자는 날에는
보약 같은 햇빛을
가린 블라인드 안에서 시무룩할 수밖에.

그러다가,
물을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비 오는 날 깜박 잊고 창문을 안 닫고
나갔다 왔더니
뿌리친 비에 구근이 흠뻑 젖어 홍난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응급 상황이라 아침저녁 햇빛 따라
화분 들고 이쪽저쪽 옮겨 봤지만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화분을 한쪽으로 치워 놓은지 몇 년~~

올봄, 흙이나 써볼까, 밀어 놨던
화분을 꺼내 꽃 삽으로 흙을 떠보니
어머나 살아있는 뿌리가 있었네
세상에나~
마른 흙 속에서 몇 년을 버틴 걸까.
자그마치 3년의 세월이다
그 캄캄한 땅속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기약도 없는 시간을
무슨 생각으로 기다렸을까.

신기하기도 하지!.
썩어 물렁해진 뿌리는 아무 데나 처박혀 있고
반쯤 살아있는 뿌리는 가로로 누워 있고
탱글탱글 살아있는 뿌리는 세로로~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그쪽이 살길이란 걸 어찌 알았을까.
식물들도 직관적 지능이 있는 걸까.

조물주의 생명 아낌은 어디든 가리질
않는가 보다
넓은 대지가 아니어도 화려한 정원이
아니어도
아파트 베란다 작은 화분의 생명까지도
지켜냈다.
포기했던 생명, 반갑고 미안하고...
구근 몇 개를
수습해 화분에 옮겨 심고
뜨거운 햇덩이를 안겨줄 기세로
돌봤다. 물세례는 또 얼마 만인가.
그동안 숨도 못 쉬고 있었을
뿌리에게
베란다 육중한 유리 문도 주욱 열어주었다
햇빛도, 바람도, 하늘에 나는
새소리도 들어 보거라~~~

그러던 어느 날, 화분에 파란색 기운이 돌더니
초록 줄기가 삐죽 얼굴을 내밀더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실바람에도
홍난은 쑥쑥 자랐다.

며칠 후, 너울너울 잎사이로 붉은 꽃대가 주욱 올라왔다.
하루가 다르게 봉긋해지더니~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세상을 향해  붉고 탐스런 꽃이 활짝 피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3년 전 고향이었을까.

머리에 손 올려 차렷! 경례로
맞이하고 싶었지만 부둥켜안고 싶었지만
자기야를 불러댔다. 이것 보라고ᆢ
혼자보기 아까운 꽃의 부활이다

얼른 눈감지 말아라~.
눈 맞춤을 하며 얼러 주었다.

죽었다 살아 나온 홍난의 기적 같은 삶
올림픽 감이다.

"식물은 자신이 무엇이고 누구인지 알고 있다"
또 식물은 어떤 위협으로부터 당장 도망칠 수는 없지만, 생태적 경쟁에는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살기 힘든 환경이 되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변혁적 행동까지 할 수 있다.
산불이나 홍수와 같은 재해를 당해도 식물은 다시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방사능으로 인해 동물들은 전혀 살 수 없는 환경이 돼도 식물은 다시 싹을 틔우고 또다시 숲을 이룬다.
ᆢ신문은 선생님(식물의 방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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