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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시대를 울린 구슬픈 목소리

앤 셜 리 2010. 6. 4. 10:29

• 일제 식민시대를 울린 구슬픈 목소리

 

 “임방울 선생이 한 번 노래하면, 떠나갈 듯한 박수 때문에 칠창(七唱) 팔창(八唱)까지 불러야했어.

요즘 말로 치면 앙코르를 여덟 번까지 한 셈이지.

 

 다른 사람이 올라오면 ‘임방울 나와라’라고 소리치며 야유를 놓는 바람에, 등쌀에 못 이겨 무대에 서지도 못할 정도였어

.” 명창 임방울의 제자인 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정철호(82)씨는 스승에 대한 기억을 묻자

 

흐뭇한 미소부터 지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10평 남짓한 정씨의 지하연습실에도 스승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전남 해남 소리꾼 집안의 독자로 태어난 정씨는 열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세 살에는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혈혈단신이 된 그는 14세 되던 해인 1938년, 임방울 명창이 목포 공연을 내려왔다는 소식에 무작정 찾아갔다.

“1000여 석 되는 목포 평화극장이 구름처럼 가득 찼어.

 공연이 끝난 뒤 선생이 머물고 있던 극장 옆 여관으로 찾아가 넙죽 절부터 올렸지.

 

 선생은 내 목소리를 듣더니 ‘성음(聲音)이 좋구나’라며 제자로 받아주셨어.

” 그 뒤로 정씨는 봄·가을이면 스승을 따라다니며

순회공연을 가졌고, 여름과 겨울이면 광주 광산에서 제자 6명이 함께 기거하며 스승에게 노래를 배웠다.

 

 눈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면 영·호남과 서울까지 떠돌아다니는 생활이었다.

 정씨는 “스승은 평상시에는 말씀이 적었고 

 놓으며 웃고 울렸다”고 말했다. 임방울 명창의 목소리에 대해 묻자, 정씨는 “하늘이 내려준 ‘천구성’이었다.

 

인터뷰 도중 정씨는 말을 멈추더니 가만히 북을 잡았다.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일제시대 120만 장 가까이 음반이 팔려나가며 만주와 일본까지 임방울 명창의 명성을 알렸던 ‘쑥대머리’였다.

 

정씨는 “춘향이가 옥중에서 칼머리를 차고서 한양 간 이도령이 그리워 부르는 노래인데, 지금 내가 부르려니 스승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국창(國唱)’으로까지 불렸지만 정작 스승의 판소리 유파가 사실상 끊긴 것이 가장 아쉽다고 정씨는 말했다.

 

그래서 스승의 소리를 계속 살려나가는 것이 제자의 마지막 임무라고 했다.

오는 20~24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막 오르는 국악뮤지컬 ‘그날이 오면 춤추며 노래하리라’에서도 작창(作唱·소리를 지어서 부름)을 맡은 정씨는 임방울 명창의 가락을 녹여 넣었다.

걸 알려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