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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부동산 불패론’의 비참한 종말

앤 셜 리 2010. 6. 6. 08:17

일본 ‘부동산 불패론’의 비참한 종말
 
 
 

지난해 일본 도쿄의 헌책방에서 ‘부동산이 최고야’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버블(거품) 붕괴로 15년간 고통을 겪은 일본에서 부동산에 대한 낙관론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됐다. ‘지가(地價) 최종 폭락’ ‘집 절대로 사지 마라’ 같은 책들이 넘쳐나는 일본에서 만난 유일한 ‘부동산 불패론’ 전도서였다. 하지만 책을 자세히 살펴보니 부동산 버블이 극성을 부리던 1989년 2월에 출판된 책이었다.

“인구는 많지만 국토가 좁아 부동산 가격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부동산에 대한 선호가 강하다.”

“부동산 투자해서 손해 본 사람이 있는가.”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재테크 서적과 거의 판박이 내용이었다. 80년대 말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을 맹신하고 부동산을 구입했던 사람들은 ‘쪽박’을 찼다. 지금도 당시 가격의 절반도 되지 않는 주택들이 허다하다. 전 세계적으로 주택가격이 급등했지만 일본인들은 요즘도 집을 사는 데 겁을 낼 정도이다.

한국은 지금 80년대 말 일본을 휩쓸었던 ‘부동산 불패론’이 뒤늦게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강남 아파트 평당 1억원 시대가 머지않았다’와 같은 황당한 ‘예언’들이 국민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현재 주택가격 급등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투기꾼이나 거액의 자산가가 아니다. 이들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집을 사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으로 거액의 빚을 내 중개업소로 달려가고 있다. 80년대 말 부동산 불패신화에 빠졌던 일본 국민들의 초조함과 절박함이 한국에서도 느껴져 두렵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겁나는 것은 우리 정부의 대응이 버블 붕괴 직전의 일본 정부와 거의 유사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 정부도 지방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전국 곳곳에 리조트·공업단지·신도시 개발 계획을 남발, 전국의 땅값을 올려놓았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투기꾼들이 부동산 가격을 올린다’는 인식에 근거, 양도세 강화·보유세 중과세·토지거래허가제 등의 정책을 폈다.

규제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르자 국민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부동산 가격에 정권 존립의 명운이 걸렸다. 코너로 몰린 일본 정부는 그제야 내수 침체 우려로 주저했던 최후의 카드를 허겁지겁 빼 들었다. 금리 인상과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

당시 이 정책을 주도했던 일본 중앙은행 총재는 ‘서민들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집값 하락에 환호성을 지르던 서민들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면서 기업 도산과 내수 침체로 이어졌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홈리스(homeless)들이 도심 공원을 점령했다. 너무 늦은, 그러나 너무 강력한 정책이 부동산 버블이라는 모래성을 일시에 허문 것이었다.

우리 정부도 마치 80년대 말 일본 정부처럼 당황하고 있다. ‘양치기 소년’으로 몰린 대통령은 또다시 부동산 정책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 관료들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정책들을 허겁지겁 쏟아내고 있다.

정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작심한다면 집값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본식으로 금리를 대폭 올리고 부동산 대출의 총량 규제를 강화하면 집값 하락이 아니라 ‘폭락’도 가능하다. 정부가 그런 극단적 수단을 동원하지 않은 것은 ‘일본식 버블 붕괴’가 아닌 ‘연착륙’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다락같이 치솟은 집값도 잡고 경기도 죽이지 않는 지혜로운 정책과 국민들의 냉정함이 정말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