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풀 꽃 피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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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침묵의 봄..

앤 셜 리 2010. 9. 6. 17:17

주말 아침 가까운 산에 올랐다. 아직 새순도 돋지 않은 나무들 사이로 가족 단위로 등산을 나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저 나무는 무슨 나무야?"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쉴새없이 주위의 어른들에게 질문을 해댔다. 젊은 부모들은 세상에 알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기껏 나무 이름이나 물어 보나 하는 표정이다. 그들 대신 "이건 상수리나무, 저건 참나무, 그 건너편은 느티나무…"라고 답을 해준 사람은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언제 잎이 나고 언제 꽃과 열매가 달리는지,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노인들은 생생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 이야기에 감탄하며 동시에 걱정도 됐다. 이분들 다음 세대에서는 과연 이렇게 나무를 보고 이름을 맞히는 일이 가능할까.

몇 년 전 레이철 카슨(Carson)이 쓴 환경 분야의 고전 '침묵의 봄'을 번역하면서 제일 고심한 것은 그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새와 꽃과 풀의 이름이었다. 사전을 한참 찾아 얻어낸 우리말 이름은 또 다른 외국어처럼 느껴졌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적도 없거니와 이름을 들어 본 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관심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은 바로 '이름'이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이건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것일수록 자세히 구분하고 분류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열심히 외우게 마련이다. 산과 들과 숲 속에서 놀고 일하던 시간은 줄어들고 집안이나 교실, 쇼핑몰과 영화관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당연히 관심의 대상도 변했다. 도시에서 자란 남자들은 지나가는 자동차 뒷모습만 보고도 모델명은 물론 기본 사양(仕樣)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여자들은 패션 브랜드의 새로운 핸드백 이름을 줄줄 외운다. 복잡한 커피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것은 물론 원두 종류까지 척척 맞힌다. 그러나 이들에게 제비와 참새는 그저 '새'이고 참나리와 진달래는 모두 '꽃'일 뿐이다.

글을 못 읽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컴퓨터를 못 다룬다고 하면, 재테크에 문외한이라고 하면 혀를 찰 것이다. 하지만 문맹이나 컴맹, 재테크맹보다 훨씬 무서운 것은 바로 '생태맹(生態盲)'이다. 인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생명체의 존재 자체가 걸려 있으니 말이다. 환경학자 데이비드 올은 자연과 화합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 정서, 교감의 가치를 옳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생태맹이라고 설명했다. 길가 화단에 무엇이 심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대한민국의 도시인들에게 그가 말한 '자연과의 교감'이란 지나친 기대일까.

생태맹이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세대를 이어가며 더욱 정도가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신비를 직접 경험한 적 없고 관심도 없는 부모들이 어떻게 자연의 의미를 가르칠 수 있을까. 글로벌한 세계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섯 살부터 영어를 배우고 '브라이언'과 '제인'이라는 영어식 이름까지 만드는 요즘 아이들에게 자연은 관심 밖 영역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에 별다른 감흥도 없고 동물과 식물은 자연도감 속에 박제된 채로 존재한다. 끝없는 학원 순례에 지쳐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으며 '사는 게 뭔지' 혼잣말 하는 일곱 살배기 꼬마들. 이들 아이에게 울새와 할미꽃과 버드나무라는 이름을 알려주고 영어 공부와 줄넘기 과외는 잠시 잊어버리라고, 산과 들 속에서 뛰어 놀라고 말해주는 부모와 교사는 멸종 위기에 놓인 수달이나 저어새만큼이나 찾기 어렵다.

1962년 레이철 카슨은 무분별한 살충제 살포로 새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을 '침묵의 봄'이라 표현했다. 그런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형태로 '침묵의 봄'이 계속되고 있다. 새싹을 내고 움을 틔우는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할 줄 모르는 무감각으로 인해, 나무와 꽃을 보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 무관심으로 인해, 눈부시게 찬란해야 할 봄이 그저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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