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처럼 즐길거 많고 볼곳도 많은 아름다운 세상에 아까운 내 시간과 돈을 들이며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자원활동의 주인공들을 뵈니 반갑습니다.
제가 자원활동을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됬다네요~
세월 정말 빠른것 같습니다.
사람은 시한부 삶을 살며 삶의 중심 부분에서 자원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어느 날 깨닫고
나자신의 보람된 삶을 위하여 어쩌면 좀 이기적인 생각으로 한국 노인 복지회를 알게 되었지요.
노인은 원래 노인이 아니고 영아로 태어나서 노인이 될때까지 허리끈 졸라메는
굶주림과 함께 고생고생 하며 일하시고 때로는 등대처럼 역사의 등불로 쓰임을 받으셨던
일평생 수고와 땀으로 이 사회를 이룩하는데 기초가 되신 분들이기에
봉사 한다는 차원이 아닌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리세대가 당연히 해야될 도리라는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의지 할곳 없으시고 심신이 허약한 노인 분들을 만나뵈며 병신 자식이라도 좋으니 자식이 있었으면 소원 하셨던분
자식은 있으나 평생 짝사랑만 하시다 끝내는 한많은 세상을 떠나신분
요즘이야 무의탁 노인들이 의료 혜택을 충분히 받으실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질병에 시달리다 원인도 모른채
치료도 못받고 떠나신 갖가지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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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노인분 중에 고척동에 사시는 윤00할머니는
특별히 어디 편찮으신거 같지는 않은데 혈색이 안좋으시고 감기란 감기는 달고 사셨다.
다른 노인분들 처럼 원인도 모르게 돌아 가시게 할수는 없어서 날 잡아서 보라매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보호자란에 도장을 찍고 병실이 없어 2박3일을 응급실에 계실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선 이부자리 잡숫는거 모두를 보호자가 해야 되었다.
빨리 준비해 오라는 간호사들의 재촉을 받으며 집으로와 급하게 압력 솥에다 죽을 쑤고 <그때는 본죽 같은거도 없었습니다>
보온병에다 뜨거운 물을 담고 응급실에서 덮을 이불 보따리를 이고 가는데 어스름한 밤이 되었다.
할머니가 병실로 옮겨 오셔서는 잠은 집에 가서 자라고 성화 하셔서 집에와 자다가도 새벽에 간호사들로 부터 불려 나가기도 했다.
무슨 검사를 하는데 일찍 보호자 싸인을 받아야 오늘 검사를 할수 있다고..
숨차게 할머니 간병을 해드리다 보니 나도 지쳤는지 어느때는 누워계신 할머니가 부러운적도 있었지만
오로지 할머니가 암진단만 아니고 치료 받으면 회복될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얻기 위해서 힘든줄도 몰랐다.
입원한지 11일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합검사 결과는 빈혈이셨다.
휴~~~ 얼마나 다행인지 헤모구로빈 수치가 정상이 11인데 할머니는 8.3인가 밖에 안나왔다.
수혈을 3병이나 받으시고 매달 드실 처방과 한보따리 약을 들고 퇴원 하셨다.
12월초 퇴원 하던 날, 집에서 맞아 주는건 한칸자리 냉방뿐이었다.
지금 같으면 흔한 온열매트가 있어 걱정 없지만 그때는 모든게 열악한때라 부랴부랴 번개탄 사다 연탄불을 피워 드렸다.
이후, 허리와 무릎 같은데는 아프셨지만 큰병없이 건강하게 잘지내시다 작년 여름 8월 10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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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정들었던 할머니와 작별하기는 힘들었지만 작은 관심으로 한 분의 인생 후반기를 제한된
수명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돌아가시게 한것같아 나에겐 보람과 행복을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생각 해보면 지금까지 성실하게 봉사를 하며 나이 들어 갈 수 있도록 매년 재교육과 월사례모임으로
이끌어 주시고 지원해주신 한국 노인 복지회 조기동 회장님과 임직원 여러분들 덕택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국헬프에이지란 이름으로 세계 50여개국 소외된 노인분들까지 챙기는 순수 자원봉사로는
선진국 나라들을 선도해 나가는 대한민국의 한국노인복지회 가족이 된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끝으로 헤르만 헷세의 간단한 시한편 들려드리겠습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가지 의무 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여러분, 행복해 지려면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 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원활동을 하시는 여러분들은 이미 행복한 분들입니다
** 1991년 9월, 19기 한국 노인복지회 자원봉사 교육생
서 정 임 올림